최종천 목사(분당중앙교회)

▲ 최종천 목사(분당중앙교회)

올바른 자기 확신 없이는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는 시대이다. 너무 많이 흔들리는 시대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딛고 서 있는 땅도, 우리 마음도, 우리가 신봉하던 신념과 분명하다고 믿었던 사람들과 심지어 자신까지도.

하루 아침에 민낯으로 보는 모든 사람과 사랑과 진리라 믿었던 사실까지,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리는 시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이 진리라고 말할 수 있으며, 과연 내가 주장하는 내가 맞는지 조차 혼미한 시대에 살고 있다. 변화무쌍한 인생, 그리고 그 인생들이 구성해 놓은 삶의 얼개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어디서부터 수습하고,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가지고 기둥을 세워 삶의 진리를 추구하며 갈 수 있는가. 지금 다만 그 어떤 경우에도 “길 찾아 가야 한다”는 당위론적 진리로, 우리를 독려하는 것이 유일한 힘이다.

우울하다. 내게 대해서도 우울하고, 옆의 사람에게도 우울하고, 놓여져 있는 상황 가운데 녹아서 사는 상황도 우울하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올바른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다. 쓸데없거나 옳지 않은 자기 확신은 우리 자신과 남의 인생을 망친다. 그러나 바른 자기 확신은 우리가 가야할 길에 대한 의지와 향수를 가지게 하고, 현재를 독촉하여 일어나고 가게 한다.

지금 우리는 ‘올바른 자기 확신’이라는 어휘 중에 ‘올바른’ 이라는 개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조차 흔들리고 있다. 불가지론이 우리를 지배할 것 같은 불안하고 어려운 시대에 처해있다. 도대체 모든 질서와 가치 체계가 부인되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실제 이러저러한 허공을 치는 해법은 진실로도 인정받지도 못하고, 약장수의 약 파는 쉰 목소리처럼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왜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설득력을 확보하지 못할까. 영적 힘의 상실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 끝내고 무너질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는 무엇이 있겠으며, 무엇이 가능할 것인가. 결국 고전적이고 상투적인 문구겠지만, 회개 외에는 답이 없다. 신문에 내고 사진 찍어서 알리는 우스꽝스러운 퍼포먼스가 아니고, 각자가 각인의 골방에서 가슴 아파하며 다른 길이 없어, 할 수 없이 이루는 회개이다. 그러면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지 알겠는가. 우리가 어디 지금 긍휼을 구할 수 있는 위치인가. 긍휼히 여겨주시면 감사할 뿐인 것이 지금의 우리 아닌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말해도 우리 자신에 대한 확신이다. 우리는 너무 자신이 없다. 다른 이를 못 믿고, 나를 못 믿지 않는가. 우리의 바닥은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했다. 한참 더 내려가서 처절하게 짓밟히고 짓뭉개져야 바닥이 보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은 아무 것도 자신이 없는 것을 보니, 그분의 자비가 임하셔서 우리에게 힘을 주실 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슬며시 들기도 한다. 그분은 우리를 버리시지는 않으시니까.

이제 그분이 불쌍히 여기실 우리에게 대하여 자기 확신을 가져야한다. 버리시지는 않으실 것이라면, 얻어맞아도 살아 있게 하실 것이고, 우리를 통해 이루실 일을 위해 우리를 교육하시고 세우시고 부끄러우셔도 혹시 사용하실 지도 모르지 않은가. 우리를 다시 사용해 달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으나, 혹시 그러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할 수는 있지 않은가.

분명한 것은 항상 극한의 어두움은 돋움을 수반했다. 불안함은 두려움이었으나 물갈이를 통해 새 역사의 문을 열었다. 더 바닥으로 내려가 더 깊이 갈 곳도 없을 때,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는 열려질 것이다. 아무도 몰랐던 무명의 그 종들을 통해 새 시대를 열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새 시대의 새 역사의 섭리와 은총을 알고 기대한다.

회개하자. 회개운동을 벌이지 말고, 그냥 각자 알아서 회개하자. 도태될 이들은 도태될 것이고, 살아남을 자 어차피 살아남아 새 시대와 새 역사를 이룰 것이다. 역사는 필연이고 하나님의 섭리의 강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고 그냥 흘러갈 뿐이다. 그 강에 나를 던지는 자, 그 흐름에 나를 싣는 자, 마음 씻고 삶을 씻고 무엇인가 살아도 될 이유를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분명하다면 그분이 주신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자. 꼬꾸라지면 다시 일어나면 되는 것이고, 내가 틀렸다면 수정하고 무릎 깨지게 회개하고 또 갈 수 밖에 없다. 슬프지만 슬픈 것이 삶이고, 역사이고, 가야할 길이다. 역사는 항상 슬프고, 그 슬픔을 바라보는 우리는 그 슬픔을 머금고 은혜의 꽃을 피워 내야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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