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3·1운동 100주년-태극기 삼천리 만세강산] ④ 도쿄를 놀라게 한 젊은이들
[역사기획/ 3·1운동 100주년-태극기 삼천리 만세강산] ④ 도쿄를 놀라게 한 젊은이들
  • 도쿄=송상원 기자
  • 승인 2019.01.25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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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민족 의지 모아 일본의 심장서 ‘조선독립’ 외치다
▲ 최팔용 김도연 백관수 윤창석 이종근 송계백 최근우 김상덕 김철수 서춘 이광수, 일제 수도에서 조선독립을 선언한 선진들의 생전 모습. 재일본한국YMCA회관 10층 위치한 2·8독립선언 기념자료실에 올라가는 계단에 조선청년독립단이 출옥 후 촬영한 단체사진과 개인사진이 전시돼 있다.

1월 초, 새해를 맞은 도쿄 거리는 분주했다. 도쿄의 중심, 황궁을 비롯해 국회 최고재판소 메이지대학 등이 모여 있는 지요다구 간다지역 또한 활기차 보였다. 고층빌딩 사이로 어디론가 바삐 이동하는 직장인들, 진보초 고서점가를 둘러보는 관광객들, 이른 시각부터 유명한 음식점 앞에 줄지어 선 사람들이 하나의 풍경을 이뤘다.

진보초역과 스이도바시역을 잇는 도로에서 니혼대학 경제학부 건물 방향으로 벗어나면 전혀 다른 세상 같은 한적한 거리가 열린다. 마치 공간이동이라도 한 듯 여유로움마저 느껴지는 그곳에 재일본한국YMCA회관이 자리 잡고 있다.

회관으로 들어서기 전, 입구 오른편에 서 있는 ‘2·8독립선언기념비’가 시야에 들어왔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피와 땀을 흘린 선진들을 기린 기념비 앞에 서니 100년 전 그날의 함성이 들리는 듯 했다. 또한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선진들의 사진을 전시돼 있는 ‘기념자료실’을 비롯해 회관 곳곳에서 식민지 종주국 수도 한복판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던 용기와 기상이 묻어나왔다.

현재 재일본한국YMCA는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행사 준비가 한창이다. 재일본한국YMCA 주재형 총무는 “부임 이래 가장 바쁜 시기”라고 말했다. 주재형 총무와 타츠케 카즈히사 기념자료실장 등 재일본한국YMCA 관계자들의 안내로 도쿄를 놀라게 한 선진들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일본의 심장에서 독립을 외치다

▲ 재일본한국YMCA회관 입구에 솟아있는 2·8독립선언기념비.

일찍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했다. 수도 도쿄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100년 전에도 동양 최대 도시였다. 당시 조선의 청년들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 도교로 향했다. 조선 유학생들은 대부분 부유층 자제로 그중에는 일제의 지배계급에 편입하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반면 일제의 실상을 파악하여 독립의 길을 모색하려는 이들이 있었다.

반일 감정을 가지고 있던 유학생들은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재일본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대한흥학회 등의 단체를 꾸려 친목을 다지면서도 조국의 독립을 고민했다. 그들은 주 활동장소였던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현 재일본한국YMCA회관)에서 유학생 기관지 <학지광> 발행, 웅변대회, 망년회, 대중강연을 진행하며 결속력을 다졌다.

특히 <학지광> 편집장 최팔용은 1918년 4월 와세다대학 동창회가 주최한 웅변대회에서 “국가 또는 민족이 멸망한다 해도 반드시 영구히 망하는 것은 아니다. 또 국가 민족이 융성한다 해도 영구히 융성되는 것은 아니다”며 독립운동의 의지를 드러냈고, 유학생들의 결기를 북돋았다.

때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종식됐다. 아울러 미국 윌슨 대통령이 약소국에서 희망을 주는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으나,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지위를 누렸던 일본에 강제 점령된 조선은 사실상 그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유학생들은 국제정세의 변화를 감지하며 독립운동을 모의하기 시작했다.

이어 1919년 1월 6일 200여 명의 유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웅변대회에서 유학생들은 “지금이 독립운동에 가장 적당한 시기이고 구체적 운동을 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그 자리에서 최팔용 김도연 백관수 윤창석 이종근 송계백 최근우 김상덕 서춘 이광수 김철수 11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했고, 다음날 그들을 중심으로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했다. 2·8독립선언이 가시화된 순간이다. 독립선언서는 이광수가 작성했고, 2월 7일 11명의 실행위원들이 서명했다.

드디어 2월 8일, 하늘은 알았을까. 드물게도 도쿄에 눈발이 날렸다. 당일 오전 조선청년독립단은 독립선언서 결의문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각국 대사와 조선총독부, 일본 국회의원과 신문사, 잡지사에 우송했다.

오후 2시,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600여 명(일본경찰 추산 400명)의 조선 유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총회를 개최했다. 회장 백남규가 개최선언을 직후 최팔용이 준비한대로 긴급동의를 발의하며 총회를 조선독립청년단대회로 변경하고 조선독립청년단을 발족하자고 제안했다.

▲ 재일본한국YMCA회관 로비에 걸려 있는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 현수막. 재일본한국YMCA는 2월 8일 도쿄, 15일 오사카에서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등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에 여념이 없다.

곧이어 백관수가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000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 만국 앞에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며 2·8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김도연은 결의문을 발표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대회장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짖는 함성으로 가득 찼다. 이어 가두시위행진도 벌이려고 했지만 예의주시하던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유학생 27명을 체포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2·8독립선언 주도자들이 체포된 후에도 최승만 등 유학생들은 2월 12일과 28일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조선 독립을 선언하며 거리행진을 벌였다.

한편 체포된 유학생들은 금고형을 선고받고 1년 남짓 형무소에서 혹독한 고초를 당해야 했다. 특히 송계백은 젊은 나이에 옥중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은 위대한 결과를 낳았다. 일제 심장에서 울린 2·8독립선언이 3·1운동의 도화선이 됐으니 말이다.

민족 깨운 선언, 그 중심에 선 기독청년들
2·8독립선언은 전 세계 민족해방운동에서도 획기적인 사건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점령됐던 그 어느 민족도 식민지 종주국 수도에서 독립선언을 한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타츠케 카즈히사 실장은 “조선 청년들이 도쿄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을 한 것은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대단한 일이다. 그들의 용기는 일본 사람인 나조차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 재일본한국YMCA회관 전경. 재일본한국YMCA는 100년 전처럼 재일한국인과 약자를 위해 헌신하는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아울러 2·8독립선언서는 3·1독립선언문보다도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힘주어 역설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훗날 변절하지만 당대 조선 3대 천재 중 하나였던 이광수가 작성한 2·8독립선언서는 논리적으로 우수한 구성을 갖췄을 뿐 아니라, 일제에 혈전까지 선언하며 대결자세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일제 수도에서 목숨을 걸고 투쟁한 청년들의 기개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셈이다.

3·1운동과 마찬가지로 2·8독립선언도 기독교인이 주도한 거사였다.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회원이던 김도연을 비롯한 조선청년독립단 11인 중 대다수가 기독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타츠케 카즈히사 실장은 “확실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지만 1910년대에는 11인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인이어야 가입이 가능했다. 일본 경찰도 2·8독립선언은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와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가 주도한 사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안타까운 점은 항일투쟁에 큰 획을 그은 2·8독립선언 자료가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2·8독립선언은 현재 회관이 아니라 1914년에 건립한 구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선포됐는데,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으로 건물 전체가 소실되면서 자료마저 사라졌다.

현재 회관 10층에 자리한 기념자료실에도 당시 상황을 기록한 신문기사와 일본 경찰 자료 사본 등이 전시돼 있을 뿐이다.

재일본한국YMCA는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식에 맞춰 자료실을 보다 넓은 2층으로 이전한다. 또한 2·8독립선언 선포 장소인 구 회관 부지에 기념비 설치를 계획하고 있다.

주재형 총무는 “2·8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아 기념자료실 이전과 더불어 영상자료도 수집하는 등 방문하는 분들에게 보다 풍부한 자료를 소개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 2·8독립선언이 선포됐던 구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의 당시 모습. 조년 청년들이 일으킨 구국의 현장은 안타깝게도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됐다.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는 1906년 11월 설립 이래 도쿄에서 유일하게 조선 유학생들이 자유롭게 모일 수 있는 쉼터를 제공했다. 미국 선교사가 대표로 있어 치외법권 지역과 같았던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의 강당을 거점 삼아 유학생들은 망년회 웅변대회 등 행사를 진행하며 친목을 다졌다.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또한 을사보호조약으로 폐쇄된 재일본공사관을 대신해 조선 유학생을 보호하는 한편, 일본어 교육과정을 개설하고 숙소까지 제공했다. 아울러 성경공부와 기도회도 진행하며 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1914년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는 조선 유학생들이 많이 거주했고 인근 니혼바시천의 범람이 잦아 부지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지요다구 니시칸다에 회관을 신축했다. 현 재일본한국YMCA회관에서 약 600m 거리다. 그리고 이곳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품었던 독립의 열망과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이라는 공간이 맞물러 역사적인 2·8독립선언이 선포된 것이다.

▲ 현재 구 회관 터인 지요다구 니시칸다에는 일본인 소유의 6층 건물이 자리해 있다.

아울러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관계자들은 막후에서 2·8독립선언 관련 실무를 담당했다. 특히 훗날 2대 총무가 된 백남훈 간사는 2·8독립선언 이후 유학생들이 체포되자 변호사를 섭외하고 모금운동을 전개하며 유학생들의 석방될 때까지 옥바라지를 했다. 그의 회고록 <나의 인생>에는 성탄절에 간수에게 부탁해 학생들과 울면서 기도했다는 일화도 담겨있다.

그로부터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재일본한국YMCA는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재일한국인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역을 전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 극우세력의 과격한 시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위안부 문제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주재형 총무는 “재일본한국YMCA는 2·8독립선언의 정신과 그리스도 정신을 계승해 평화롭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나아가고 있다. 2·8독립선언 100주년으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올해만이 아니라 국민들의 지속적인 성원과 후원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정치가 요시노 사쿠조오

일본의 양심, 조선 청년 살리다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일본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의 묘비에 새겨져 있는 문구다.

▲ 후세 다쓰지

후세 다쓰지는 민중운동에 투신하며 조선의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한 일본의 양심이다. 특히 2·8독립선언 주역들의 무료 변호를 맡아 잘 알려진 인물이다.

2·8독립선언 직후 일본 검찰은 조선청년독립단에 내란죄를 씌우려 했다. 하지만 후세 다쓰지는 “학생들의 신분으로 자기 나라와 독립을 부르짖는 것이 어찌 일본 법률의 내란죄에 해당된단 말인가. 당치도 않다”고 주장하여, 금고형에 머물게 했다. 일제가 1919년 말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을 독립운동의 책원지로 간주하고 일본조합교회 관리 하에 두려 했지만 그 역시 저지했다.

그는 이중호투탄의거를 거행한 김지섭 의사의 변론과 대역사건모의로 체포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변론도 맡았다. 뿐만 아니라 광복 이후에는 <조선건국 헌법초안>을 저술하기도 했다. 우리 정부는 2004년 이와 같은 공적을 바탕으로 후세 다쓰지에게 일본인 최초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후세 다쓰지 절친 요시노 사쿠조오도 조선의 독립을 적극 도왔다. 요시노 사쿠조오는 후세 다쓰지에 비해 국내에 덜 알려졌지만, 민주주의를 주창한 정치가이자 교육가로 일본 내 상당한 영향력이 있던 인물이다.

▲ 요시노 사쿠조오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동경제국대학YMCA 이사장을 역임하며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와도 친분을 쌓았다. 그는 2·8독립선언이 일어나기 전부터 조선과 중국 유학생들을 초청해 민주주의 강연을 진행했으며, 기독교 민주주의자 입장에서 유학생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후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라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조선인 6000여 명이 학살되는 잔혹한 사태가 벌어진다. 그때에도 요시노 사쿠조오는 조선 유학생을 자택에 숨겨주며 구원자로 나섰다. 나아가 조선인 학살사건을 비판하고 실정조사서까지 작성한 그는 일본 제국시대에 또 한 명의 양심이었다.

타츠케 카즈히사 실장은 “돌아보면 일본에게도 어두운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과 함께 살려했던 선배들이 있었다. 작은 빛이지만 그들을 통해 희망을 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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