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곰팡이를 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곰팡이가 서식할 수 없을 만큼 깨끗하고 완벽한 세상은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눈에 띠면 깨끗이 닦아낸다. 그 곰팡이와 공존하려면 그 찝찝한 기분을 견뎌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에 띠지 않는 곰팡이는 계속 살아남는다. 숨어있기 때문이다. 이런 숨은 곰팡이까지 샅샅이 찾아내 없애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집안을 항상 깨끗이 유지하면 된다. 즉 곰팡이 서식환경을 만들지 않으면 된다. 화학적 방법을 쓰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햇빛을 불러들이고 환기를 시키고 또 습기가 많은 구석을 없애는 등 깨끗한 환경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 총회가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변화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변할까? 그동안 총회를 어지럽히거나 문제를 일으킨 인사들을 완전히 청소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 그렇게 밀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총회가 근원적 변화를 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인사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오히려 더 지능적으로 훨씬 해결하기 힘든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의 환경을 새롭게 조성해야 한다. 불법, 편법, 탈법과 부정한 일들이 일어날 수 없는 환경과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몰상식하거나 비이성적인 행위가 통하지 않는 환경조성만이 변화를 만드는 가장 빠른 방법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부터 변하는 것이다. 유불리나 이해관계에 따라 동의와 반대를 오가지 않아야 한다. 정치적 판단이 아닌 도덕적 판단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도덕적 판단을 넘어  성경적 판단을 해야 한다.

진정한 변화를 원한다면 교회든 교단이든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이런 명제를 놓치지 말자. 변화는 혁명이 아니다. 일반적인 혁명은 보통 그 주체들이 목숨을 걸고 시도한다. 실패하면 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혁명 후에는 피의 숙청이 뒤따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변화는 다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지향성을 갖는다. 우리 주님은 죄인을 죽여 없애서 바뀌는 세상이 아닌 좀 늦어도 사람들의 변화를 통한 새로운 세상을 원하셨다. 변화라는 이름하에 부끄러운 과거를 가졌거나, 옳지 못한 사람이라고 평가되는(누구도 단정할 수 없지만) 모든 이를 몰아내야 한다면 그렇게 주장하는 ‘나’부터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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