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설교학, 성경 자체 강조 약화되고 전달에 치중 … “인간의 체험 강조하고 경험에 호소하라” 청중 역할 이끌어

전통적 설교 한계 넘어 설득력 있는 ‘전달’ 추구한다


<기독신문> 기고를 시작하면서

▲ 류응렬 목사 ●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 고든콘웰신학교 객원교수● 전 총신대 교수

<기독신문>을 통해 목회자님들과 성도님들을 뵙게 되어 참으로 기쁘고 영광스럽습니다. 부족한 사람에게 귀한 지면을 통해 설교에 대한 글을 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기독신문 관계자님들께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기고 연재 부탁을 받고 목회에 전념하는 상황인지라 망설여졌지만 보잘것없는 사람을 세워주고 은혜를 입게 한 우리 교단을 생각하면 부족한 대로 순종함으로 조금이라도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려 합니다.

저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총신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미국 고든콘웰신학교에서 구약과 신약을 공부하고, 서든뱁티스트신학교에서 신약과 설교학을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난 10년 동안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설교학을 가르쳤습니다. 현재 미국 수도 워싱턴에 있는 와싱톤중앙장로교회에서 6년 가까이 담임목회를 하고 있으며, 보스턴에 위치한 고든콘웰신학교에서 객원교수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칠 때도 참 감사하고 행복했지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성도들을 섬기면서 생애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특별기고를 통해 소개하고자 하는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최근의 설교학 흐름을 소개하고 개혁신학과 성경적 설교 입장에서 평가하면서, 그 대표적인 사람들의 가르침과 설교를 살펴보려 합니다. 최근의 설교학이 많은 신학적 문제를 안고 있지만 배워야 할 부분 역시 적지 않습니다. 최근의 설교학을 잘 살피면 성경적 설교를 강조하는 우리가 보충해야 할 것을 조금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새로운 설교학의 가르침과 달리 기독교 역사에 오랫동안 등뼈 역할을 해 온 강해설교와 강해설교자를 다루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교훈을 찾고자 합니다. 진리의 말씀은 변함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시대에 맞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셔서 강단을 새롭게 함으로 영혼구원과 세상변화를 추구해 오셨습니다.

셋째, 최근 설교학과 강해설교의 기본 흐름을 이해한 후에 모든 목회자의 최대 관심인 성경적 설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작성할 것인지를, 설교작성 과정을 실제 사례와 함께 탐구하면서 강단에 적용하려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족한 사람의 본문이해와 설교작성을 구체적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으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진실하게 고백한다면 시대와 장소, 민족과 상황을 떠나 하나님이 세우신 주님의 교회입니다. 부족한 사람의 글을 통해 <기독신문>을 애독하시는 목회자님들이 진리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바르게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여 강단에 신선한 새바람이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조국의 각 교회마다 강단에 진리의 샘이 솟아나 교회마다 거룩한 부흥을 체험하고, 이 불길이 지역교회를 깨우고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길 소망합니다. 나아가 진리의 말씀선포로 인하여 주님께서 그토록 기대하시는 세계선교에 소중하게 쓰임 받은 우리 교단과 한국교회가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글을 시작합니다.

‘최근의 설교학’ 이해

설교학 흐름을 말할 때 주로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전통적으로 본문을 중시해 온 강해설교 혹은 성경적 설교가 있고, 전통적 설교에 반기를 들고 전달을 강조해 온 최근의 설교학 흐름이 있습니다. 최근의 설교학이라고 말할 때, 영어로 ‘New Homiletics’라 부릅니다. 시기적으로 프레드 크레독이 1971년에 <권위 없는 자처럼>(As One without Authority)이라는 책을 출간한 이후 약 35년간의 설교학 흐름을 두고 최근의 설교학이라 부릅니다. 앞으로 최근의 설교학이 전통적인 설교학과 무엇이 다른지, 그 특징들을 소개하고 최근의 설교학을 이루는 주요 학자들을 살피고자 합니다. 그 후에는 강해설교라 불리는 성경적 설교의 가르침은 무엇이며, 그 중심을 지배하는 대표자들을 살피고자 합니다.

새로운 설교학이 전통적 설교와 가장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성경에 대한 이해와 설교전달에 대한 시각에 있습니다. 전통설교가 성경 진리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설교했다면, 최근의 설교학은 성경 자체에 대한 강조가 약화되고 전달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점차 성경과 설교에 무관심해 지는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그들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할 것인가, 즉 전달의 문제가 새로운 설교학의 출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의 설교학 흐름 근저에는 전통적 설교기법이 현대인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는 인식에서 시작합니다. 전통적 설교는 전달방식에 대한 고찰보다 주로 성경내용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왔습니다. 기독교 설교 역사에 전달법은 항상 강조되어 왔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위 ‘들려지는 설교’를 향한 관심이 특별하게 일어났습니다. 프레드 크래독, 유진 로우리, 데이빗 버트릭 같은 사람들이 이 운동을 주도했고, 이러한 새로운 설교 흐름을 ‘새 설교학’이라 부릅니다.

새 설교학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리처드 에스링거라는 설교학자입니다. 그는 이전의 설교가 명제적이고 교훈적인 설교 위주로 행해졌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실패했다고 진단합니다. 다양한 설교양식과 전달방식을 제시함으로 본문을 보다 역동적으로 살리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펼쳐졌습니다. 설교전달에 대한 이러한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기란 어렵지만 주로 귀납적 설교, 현상학적 설교, 내러티브 혹은 이야기식 설교, 그리고 스토리텔링 설교 등으로 불려 왔습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새로운 설교학은 1971년 프레드 크래독이 <권위 없는 자처럼>을 출판한 후 설교학의 큰 맥을 형성해 왔습니다. 크래독이 주장한 귀납적 설교는 지금까지 전통적인 강해설교 신학이 주를 이루었던 미국 신학교와 강단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크래독과 입장을 함께 하는 유진 로우리와 데이비드 버트릭 같은 사람이 뒤를 이었고 우리나라에도 이런 학자들의 책이 소개되어 왔습니다.

새로운 설교학에는 배울 점도 경계할 점도 동시에 존재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청중의 마음을 얻기 위한 그들의 전달법은 잘 수용해서 효과적인 전달에 도움을 얻어야 하지만, 그들의 성경관과 설교신학 자체는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전통적인 설교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설교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핵심은 전통적인 설교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설교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설교란 설교자가 전하고자 하는 성경 진리를 주로 논증과 설득을 통해 설명하는 것에 치중합니다. 새 설교학자들은 이러한 전통적인 설교기법이 현대인들에게 더이상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설교학자들의 주장은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대체로 일치를 보입니다.

첫째, 기존의 명제적이고 교훈적인 설교 대신 비명제적이고 서술적인 설교를 지향합니다. 명제적이고 교훈적이라는 말은 설교자가 이미 답을 지닌 채 설교를 통하여 일방적으로 그 답을 풀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주로 3대지로 구성하고, 각 주제를 설명하고 예화를 들면서 결론을 맺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새 설교학자들이 문제를 삼는 것은 바로 이런 대지로 진리를 전달하는 방법에 있습니다. 설교자가 성경을 통하여 뻔한 답을 제시함으로써 본문의 역동적인 흐름을 무시해 청중의 관심을 저하시킨다고 비판합니다. 명제적인 설교의 대안으로 새 설교학자들은 인간의 체험을 강조하고, 청중의 경험에 호소하는 설교를 추구합니다. 주로 성경 본문으로부터 시작하는 기존 설교와 달리 이들은 인간의 체험으로부터 설교를 시작하고 체험으로 마치기도 합니다. 청중에게 자신들이 지니는 삶의 문제와 경험을 다뤄 설교를 자신의 이야기로 체험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둘째, 새 설교학자들은 한결같이 청중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설교자가 결론을 제시하는 전통적인 설교와 달리 이들은 청중에게 스스로 결론을 내리게 함으로써 설교에 능동적으로 동참하게 합니다. 명제적인 설교의 특징은 주로 설교 마지막에 결론을 제시함으로써 설교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새 설교학자들은 이러한 기존의 설교 유형이 지나치게 설교자에게만 치중되어 있다고 비판합니다. 설교에서 청중은 무시되거나 일방적으로 설교를 듣는 자세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설교의 중심축을 본문에서 청중으로 옮겼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셋째, 인지적이고 연역적인 설교를 비판하는 새 설교학은 자연스레 설교의 형태에서 긴장과 흐름을 지닌 내러티브 설교를 지향합니다. 성경의 4분의 3이상이 내러티브 형식으로 되어 있음을 강조하며 기존의 설교가 천편일률적으로 본문의 기록 양식을 무시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성경의 기록 양식을 살려내어 설교에서도 동일한 형식으로 적용하자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버트릭은 성경의 문학적인 특색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성경이 역사라기보다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기 시작한다. 심지어 내러티브 양식의 본문이 아닌 것조차 성경 언어는 움직이는 사고의 그림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며 성경의 내러티브 형식을 강조합니다. 버트릭의 이 주장은 성경의 내러티브 성격에 새로운 관심을 지닌 새 설교학자들의 분위기를 집약하는 말입니다. 이야기를 살려내자고 주장하기에, 성경본문을 다룰 때도 교리적 내용을 담은 바울서신보다 구약의 내러티브나 예수님의 비유 같이 이야기를 선호합니다.

이번 글에는 새로운 설교학의 출현과 그들의 주장을 간단히 살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새로운 설교학 주장의 장단점을 살피면서 우리가 수용할 점과 경계할 점을 다루고 그 중심인물과 설교를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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