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학살과 진압은 독립 위한 순교신앙 막지 못했다

▲ 아우내장터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에는 3000여 명이 모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충남 천안시 병천면 소재 아우내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

제암교회

‘인간이 얼마나 악하고 잔인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나라 잃은 백성의 설움과 고통을 필설로 설명하는 일이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 그것을 극명하게 드러낸 비극이 제암교회 학살사건이었다.

제암교회는 이례적으로 선교사가 아니라 한국인이 1905년에 세웠다. 마을의 지도자이자 이장이었던 안종호가 서울에서 복음을 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자기 집을 예배당으로 내놓은 것이 교회의 시작이었다.

특히 3·1운동 당시 제암교회에는 김교철 전도사가 부임하여 성도들에게 민족정신을 확고하게 심어줬다. 제암교회는 마을과 인근 지역의 지도자들이 서울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접하고 1919년 3월 31일 발안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준비하는 근거지가 됐다. 제암교회가 민족혼을 심어주고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하고 일경들이 꼬투리를 찾으려고 혈안이 됐지만 성도들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 유관순 기념관 내에 있는 유관순열사상.

드디어 장날을 맞아 주민 1000여 명은 주재소 앞으로 달려가면서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무자비한 매질로 맞대응했고 시위대에 섰던 김순화 성도는 창자가 밖으로 나올 정도로 구타를 당했다. 3명이 사망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고 피를 흘렸다. 일제의 잔혹한 진압에 울분을 참지 못한 사람들은 4월 2일과 3일 연이어 시위를 벌였고 일제는 인근 수촌리를 들이닥쳐 민가에 불을 지르며 보복했다.

격렬했던 보름의 시간이 지난, 4월 15일 화요일 오후 2시였다. 일경들과 수원에 주둔하던 헌병들이 제암리 마을로 들어오더니 3월 말 만세사건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을 사과할테니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제암교회로 모이라고 알렸다. 제암교회 성도들은 일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꿀릴 것이 없었기에 당당하게 일경들 앞에 섰다. 일경들은 성도들을 예배당 안으로 몰아넣고 기독교에 대해 질문을 한다고 하더니 대답에 괜한 트집을 잡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곧바로 문을 닫고 예배당 안으로 총질을 했으며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예배당이 불탄다는 소식에 놀라 버선발로 뛰어나온 아낙내들이 있었으나 일제는 그들에게도 총을 쏘거나 머리채를 움켜 잡고 칼날로 사정없이 목을 내리쳤다.

교활하고 잔인한 일제의 덫에 빠져 이날 남자 21명이 예배당 안에서, 여인 2명이 밖에서 죽임을 당했다. 일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제암리 내 33채의 가옥을 불질렀으며 이웃 마을 고주리로 넘어가서 천도교 신자 6명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

이 끔찍한 일을 겪었기에 아무도 순교자들의 장례를 치를 엄두를 내지 못했으나 스코필드 선교사가 담대하게도 시신을 담을 가마니와 각목을 수레에 싣고 제암교회를 찾았다. 이때 사람들은 새까많게 그을린 21구의 시체가 한덩어리로 모여 죽어있는 비참한 장면을 목격했다. 무너진 예배당의 석가래와 잿더미 속에서 시체 한 구 한 구를 꺼내고 떼어내는 일은 차마 이 세상에서 상상할 수 없는 처참함, 그대로였다. 만세운동으로 순교한 23인 성도들의 묘소가 마련된 것은 사건이 있은지 63년이나 지난 1982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 제암교회는 화성시 3·1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감당했다.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에 있는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마당.

오늘날의 제암교회는 아담하지만 아름다운 건물로 다시 태어났으며 교회 1층에는 화성시에서 세운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기념관 앞 공원에서는 3·1운동 순국기념탑, 23인 순국묘지, 23인 상징조각물, 스코필드 박사 동상 등을 만날 수 있다. 순국기념관에서 제암교회 사건에 대한 영상과 역사자료를 감상할 수 있지만, 교회가 당했던 아픔은 아무래도 제암교회 강신범 원로목사에게 듣는 것이 더 은혜롭다.

▲ 제암교회 원로로 과거 역사를 술회하고 있는 강신범 목사.

강신범 원로목사는 “100년 전 제암교회에서 순교한 선조들을 생각할 때마다 어찌 그리 용감할 수 있었을까 하고 감탄한다”면서 “그때와 비교할 때 말할 수 없이 풍요로운 삶을 살지만 나약해진 우리들은 제암교회 성도들의 순교신앙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우내장터

충남 천안시 병천면에 있는 아우내장터에서 1919년 4월 1일 호서지방에서 가장 큰 민족운동이 일어났다.

그날 정오 3000여 명의 사람들은 손에 태극기를 들고 결집하여 조인원의 주도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유관순이 곧이어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선창하자 본격적인 만세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당황한 일경들은 예의 주시하다가 오후가 되자 무차별 발포를 시작, 60여 명 이상(즉사 19명)이 쓰러졌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은 헌병주재소로 쇄도하며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유관순과 매봉교회 지도자들은 주모자로 곧바로 체포되었고 천안헌병부대 유치장에 10일 동안 갇힌 다음 공주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됐다.

아우내장터 3·1운동은 18세의 유관순 열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매봉교회와 진명학교에서 배움과 신앙생활에 몰두했던 유관순은 순회 전도차 공주 예배당을 찾은 엘리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서울 이화학당에 진학했다. 평소 쾌활하고 적극적이었던 유관순은 1919년 3월 1일 수많은 인파가 서울 파고다공원에 모여 독립을 외칠 때 학생 비밀결사대에 속해 활동했다. 일제는 3월 10일부로 각급 학교 휴교령을 내렸고 학생들은 고향으로 내려가서 그 지방의 만세운동을 주도하거나 합류했다. 유관순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사촌 언니 유예도(에스더)와 함께 귀향했다.

▲ 제암교회와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의 모습.

유관순이 돌아오자 매봉교회 지도자들은 서울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의 상황을 자세히 듣고 병천에서도 만세운동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총본부는 지령리교회(현 매봉교회)에 두고 조직을 구성했으며 음력 2월 그믐날 지령리 매봉에서 봉화를 올리면 각 지역 책임자들도 봉화를 올리기로 의논했다. 거사 당일에 나누어줄 태극기를 준비하고 그 작업을 청년들과 마을 부녀자들이 비밀리에 진행하도록 당부했다. 유관순과 사촌 언니 유예도는 연락을 시작했고 교회 청년들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매봉산에 올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으며 거사 전날 봉화를 무사히 올렸다. 그리고 다음날 아우내장터로 모인 수천여 명의 군중들은 일사분란하게 운동을 진행하여 일경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공주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된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유관순은 시종 당당하게 “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군기(무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 자유는 하늘이 내려준 것이며 누구도 이것을 빼앗을 수 없다. 무슨 권리로 신성한 인간의 권리를 빼앗으려 하느냐“고 항의했다.

그러나 파렴치한 법원은 유관순에게 5년형을 언도했다. 이 형량은 여성으로서 더구나 학생으로서 유례가 없는 최고형이었다. 유관순은 이같은 판결에 불복해 복심법원에 항고하여 서대문감옥에 이송되었고 1919년 6월 3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게 됐다.

▲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전시실.

고문과 구타로 몸이 상했고 부상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던 유관순은 안타깝게도 1920년 9월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의 시신은 정동교회 목사의 주례로 친구와 선생들이 모인 가운데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그러나 이 묘지가 일제의 군용기지로 전환됨에 따라 파헤쳐져서 유관순의 묘는 찾을 수 없게 됐다. 또 그의 생가도 불태워 없어졌다.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의 근거지였던 매봉교회 역시 1930년 일제의 압력으로 포교 폐지계를 제출했다. 1932년에는 결국 교회가 아예 폐쇄되는 아픔을 겪었다.

유관순 열사를 기억하면서 아우내장터를 거닐 때 1919년 만세의 함성이 귓가에 생생히 들리는 듯 하다. 장터를 들르기에 앞서 매봉교회 및 전시관과 교회 옆에 있는 유관순 생가를 찾아보고, 거기서 1.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유관순기념관을 방문하면 열사의 기개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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