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서 들불처럼 일어난 만세운동, 기독인 최전방에 서다

▲ 구암교회 성도들이 옛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 후예들과 함께 매년 3월 1일 열고 있는 군산 3·5만세운동 재현행사.

한강이남 최초의 군산 3·5만세운동

종로에서 무려 200km도 더 떨어진 군산의 한 언덕. ‘궁멀’이라 불리는 이 동네에서 1919년 3월 5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 듯 울려 퍼졌다. 탑골공원에서 봉기가 있은 지 불과 나흘 후, 한강이남에서 최초로 벌어진 만세운동이었다.

궁멀은 당시 미국남장로교 군산선교부가 자리 잡은 터전이었다. 궁멀교회(구암교회) 영명학교(군산제일고) 멜볼딘여학교(영광여고)가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구암예수병원도 궁멀동산에 나란히 함께하고 있었다. ‘군산 3·5만세운동’이라 불리는 봉기는 바로 그 궁멀을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던 기독인들이 선봉에 서서 시작된 사건이다.

▲ 옛 영명학교의 모습을 복원하여 개관한 군산3·1운동100주년기념관.

3월 1일의 만세운동에서 민족대표들과 학생세력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던 세브란스병원 직원 이갑성은 영명학교 출신으로 당시 세브란스의전에 재학 중이던 김병수를 은밀히 부른다.

인쇄된 독립선언서 95장을 몰래 품고 고향에 내려온 김병수는 영명학교 은사인 박연세를 만나 임무를 완수했고, 박연세는 동료들과 상의 끝에 영명과 멜볼딘 그리고 예수병원을 중심으로 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한다. 날짜는 군산 장날인 3월 6일로 정했다.

하지만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챈 일본 경찰들이 하루 전 학교로 들이닥쳐 태극기들을 압수하고, 박연세와 이두열 등 교사들을 체포해갔다. 군산 봉기는 그대로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김윤실 등 다른 교사들과 학생들은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만세운동을 앞당겨 강행했다.

3월 5일 학생 100여 명과 교사와 병원 직원 40여 명으로 시작된 만세행렬은 궁멀을 출발해 시내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 많은 시민들이 합세하며 행렬의 규모는 500여 명으로 크게 늘었다. 군중들이 군산경찰서 앞까지 밀려들어오자 당황한 일본 경찰은 헌병대에 지원을 요청했고, 출동한 군인들의 발포로 사람들이 쓰려졌다. 그리고 현장에서 고석주 등 90여 명이 검거됐다. 대부분 영명과 멜볼딘의 교사·학생들이었다.

▲ 군산 3·1운동기념공원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기념탑 및 벽화와 조형물들.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3월 10일에는 강경에서, 3월 13일에는 전주에서, 3월 29일에는 서천에서, 4월 4일에는 익산에서 만세함성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고 그 배후에는 엄창섭 김인전 문용기 등 영명학교 출신들의 엄청난 활약과 희생이 있었다.

일본의 탄압이 궁멀에 집중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영명과 멜볼딘의 수업은 중단됐고, 박연세를 비롯한 교사 4명과 양기철 등 학생 11명이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영명학교의 특별과는 전격 폐지되고, 구암예수병원 직원들 전원이 구속되면서 병원 운영은 마비됐다.

그러나 대한독립을 소리쳐 부르던 기개는 지금까지 살아남아, 매년 3월 1일이 돌아오면 당시의 후예들이 다시금 궁멀로 모여들어 만세운동을 재현하며 군산경찰서 앞까지 씩씩한 행진을 한다.

이 행사를 주도해온 군산삼일운동기념사업회(회장:김영만 목사)의 오랜 꿈은 이제는 구암동산이라 불리는 옛 궁멀을 성역화하여, 기독인들의 삼일정신을 군산 시민뿐 아니라 온 겨레 앞에 선양하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그 꿈은 군산시의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구암동산 일대를 3·1운동기념공원으로 조성하는 사업으로 현실화됐다. 구암교회당은 호남선교와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우뚝 섰고, 기념탑과 조형물 벽화 등이 곳곳을 채워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여름 옛 영명학교 건물을 재현한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건립으로 성역화 사업은 대미를 장식한다.

김영만 목사는 “100년 전 영명학교 운동장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드디어 올해에 옛 모습 그대로 재현된다는 기대에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면서 “이 땅을 지킨 선열들의 애국신앙을 후세에 잘 전수하는 구암동산으로 가꾸어나가겠다”고 다짐한다.

 

▲ 대구3·1운동길의 90계단 앞에 선 전 대신대학교 총장 전재규 장로(서현교회 원로). 역사 속에 묻혀있던 대구의 3·1운동이 전 장로를 통해 되살아났고, 여러 모양으로 계승되고 있다.

다시 찾는 대구 3·1운동길

“누가 피고에게 선동하였는가?”(재판장)

“내 땅 내어달라고 하는데 무슨 피고인가? 하나님이 시켰다.”(김태련)

대구지방법원 조선총독부 재판정 앞에 선 김태련. 김태련은 당시 대구 남산교회 조사이며,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이만집 목사와 함께 1919년 3월 8일 대구의 만세운동을 이끈 인물이다. 대구3·1운동 주동 혐의로 재판받은 김태련 조사는 자신은 피고가 아니며, 일제를 향해 강탈당한 나라의 독립의 당위성을, 그리고 독립운동은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당당하게 설파했다. 과연 100년 전의 3월 8일에 대구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1919년 3월 8일은 토요일이자, 옛 서문시장인 큰장이 서는 날이었다. 지금의 동산병원 내 청라언덕은 당시 솔밭이었다. 이 솔밭 사이로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한복을 입은 장꾼으로, 빨래하러 가는 아낙네 차림으로 위장한 계성학교 신명학교 학생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다른 편에서는 대구고보(현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이 큰 장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이들 학생들 품안에는 계성학교 아담스관 지하에서 등사한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선언서와 태극기가 체온보다 더 뜨겁게 숨 쉬고 있었다.

오후 2시경, 김태련 조사가 큰장 어귀 소금집 앞에 있던 달구지 위에 올라, 품속에 감춰뒀던 독립선언문을 꺼내들고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줄 읽지도 못했다. 주변에 있던 일본 순사가 이를 발견하고 김태련 조사 손에 들려 있던 독립선언문을 빼앗았다. 자칫 만세운동이 물거품 될 순간에 직면했다. 이때 이만집 목사가 다급하게 달구지에 올라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독립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나라가 독립할 수 있도록 각자 힘차게 만세를 부릅시다”라고 외친 뒤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 대구근대문화골목 투어는 동산병원 청라언덕의 ‘3·1운동길’부터 시작한다. 과거 솔밭이었던 이곳은 계성학교 신명학교 등 기독학생들이 만세운동에 동참하고자 지난 길이다.

만세운동을 위해 주변에 흩어져 있던 남성정교회 신정교회(현 대구서문교회) 남산교회 성도들과 계성학교 신명학교 대구성경학원(현 대신대학교·영남신학대학교 전신) 대구고보의 교사와 학생, 대구YMCA, 여기에 장을 보러 나온 시민들이 이만집 목사 곁으로 몰려들어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목청껏 대한독립을 외쳤다. 만세운동은 큰장을 시작으로 동산교-대구경찰서 앞-경정통(현 종로)-남성정(현 약전골목)-중앙파출소-달성군청(현 동성로 대구백화점 부근)까지 이어졌다.

성도와 기독학생들 중심으로 시작된 만세운동은 상인 농민 노동자 등 시민들까지 가세해 1000여 명 규모로 늘어났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일본경찰과 대구 주둔 헌병대들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해산됐지만, 3월 10일과 4월에 남문외시장(현 염매시장)과 달성공원에서 소규모의 만세운동이 후속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대구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흩어져 경북지역 곳곳에서 지역의 교회 성도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대구의 3·1운동은 철저하게 기독교의 애국애족정신 표출이었다.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었던 이갑성이 1919년 2월 24일 대구를 찾아 남성정교회의 이만집 목사와 이상백·백남채 장로, 김태련 조사 등 지역의 교회와 기독학교 교사들을 만나 민족거사를 설명하고 대구지방의 대표가 될 것을 요청했다. 이처럼 대구의 교회들은 영남지역 만세운동 효시를 이룬 봉기의 주체였다. 3월 8일 1차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157명 가운데 재판에 회부돼 형을 받은 이는 모두 76명. 그 가운데 절대다수가 목사와 장로, 기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라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한다.

▲ 대구 서성로교회 옆에 세워진 ‘대구3·1독립운동발원지’ 표지석. 이곳에서 대구·경북 최초로 ‘대한독립만세’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이듬해 안동에서 열린 제8회 경북노회 때 시찰별 보고를 보면 교인 및 교회 수가 확연하게 늘었고, 심지어 비신자들이 교회나 기독학교 설립에 토지나 자금을 기부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외래종교’에 지나지 않았던 기독교에 대해 사회적 인식이 바뀐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이처럼 기독인들이 주도한 대구·경북지역의 3·1운동이 이후 교회에 미친 영향은 실로 컸다.

대구시 중구 동산병원 청라언덕에 있는 ‘3·1운동길’과 ‘90계단’, 그리고 섬유회관 맞은편 이만집 목사가 독립만세를 처음 외쳤던 위치에 세워진 ‘대구3·1독립운동발원지 표지석’에서 100년 전 대구 만세운동의 숭고한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매년 3월 1일 대구지역 장로들이 초교파적으로 모여 대구3·1운동 재현행사를 대규모로 갖고 있다. 특히 3·1운동길과 90계단은 내외국인 관광객들로부터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근대문화골목’ 코스의 시작점에 있다. 이렇듯 각양의 모습으로 대구 3·1운동과 기독인들의 애국정신이 전승되고 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