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용 전도사가 꺼낸 독립선언문, 만세함성 불 지피다

기미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100돌을 맞는 역사적인 2019년이 시작됐다. 한국교회가 사회적 신뢰와 지도력을 상실해가는 이 시대에 3·1운동은 단순히 화려한 시절의 추억으로만 기억되어야만할까. 본 기획에서는 만세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한국교회가 민족사에 끼친 역할을 살펴보고, 당시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준 기개와 열정을 이 시대 한국교회가 어떻게 계승할 지 탐구한다.
<편집자 주>

 

● 1919년 1월 27일 대관원
기독교청년회(YMCA) 간사 박희도가 관수동의 중국음식점 대관원(大觀園)으로 서울 시내 학생대표들을 소집했다. 여덟 명의 학생들이 이 자리에 모였다. 보성 연희 경성 세브란스 등의 재학생 혹은 졸업생인 이들은 학생들 사이에 신망을 받는 젊은 지도자들이었다.

표면적인 주제는 학생들에게 박희도가 YMCA 가입을 권하는 것이었으나, 실제 대화의 방향은 다른 쪽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이야기, 동경 유학생이 준비하고 있는 2·8독립선언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다. 조국의 젊은이들도 여기에 호응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자는 주장 또한 등장했다.

그 자리에서 확실한 결론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 모임은 한 달여 후 전개된 3·1운동에 기독교 천도교 불교 등 종교세력 뿐 아니라 학생세력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됐다.

▲ 승동교회가 3·1운동의 기념터임을 알리는 표지석.

● 1919년 2월 20일 승동교회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김원벽은 승동교회 청년면려회장으로 활동하며 특히 기독교계 학생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그는 당초 독립운동 전개에 회의적이었다. 대관원의 모임에서 신중론을 적극 제기했던 인물도 바로 그였다.

▲ 당시 학생들이 실제 모의장소였던 승동교회내 지하 밀실.

자신도 독립을 원하지만 민족을 이끌어가야 할 지도자들은 분열을 일삼고,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았다. 가망 없는 노력이 되리라 생각했다. 다른 학생대표들은 마음이 급했다. 김원벽의 협력 없이는 일이 되지 않을 것으로 여겨, 만나서 설득하기를 반복했다.

김원벽의 마음을 돌려세운 것은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 맥큔(한국명 윤산온)이었다. 고심을 거듭하는 김원벽에게 맥큔 선교사는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한국은 아직 독립국으로서 실력은 갖추지 못했으나 독립을 위한 시도는 할 수 있는 일이다. 무슨 일이나 생각만으로 되는 법은 없다. 실제 행동만이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이후 학생들의 움직임은 빠르게 진행됐다. 마침내 2월 20일 제1회 학생간부회의가 승동교회에서 개최됐다. 당초 이날은 학생들이 독자적으로 독립을 선언하기로 결정했던 날이었다. 하지만 기독교와 천도교가 힘을 합해 거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에 행동을 늦추기로 했다.

김원벽은 일단 학생들이 준비했던 독립선언서를 불태우고, 3월 1일의 거사에 학생들도 동참하도록 다른 학생들을 설득했다. 대신 3월 5일에 학생단체 주도로 별도의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서로 간 역할을 분담했다.

● 1919년 2월 28일 정동교회와 승동교회
세브란스병원에서 근무 중이던 이갑성은 학생들과 종교단체 간의 연결고리였다.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기독교 청년층의 대표 역할을 맡기도 했다. 역시 기독교계 인사로 분류되는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가 보성사에서 인쇄되어 나오자, 이갑성은 이를 거사 하루 전인 2월 28일 오후 세브란스의전에 다니던 학생 김문진을 통해 학생 대표자 중 한 사람인 강기덕에게 전달한다.

이날 밤 정동교회에서는 중학교 대표들이, 승동교회에서는 전문학교 대표들이 각각 모여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며 거사를 위한 최종 점검을 한다. 기독교계 학생들은 종로 남쪽, 불교계 학생들은 종로 북쪽, 천도교계 학생들은 남대문 밖을 각각 맡아 선언서를 배부하기로 하고 행동에 착수한다. 일제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감쪽같고 치밀한 준비였다.

▲ 1919년 3월 1일 정재용 전도사가 올라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탑골공원의 팔각정.

●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
정재용 전도사는 인내심이 극에 달했다. 만세운동이 벌어진다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찾아온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의 분위기는 예상과 달랐다. 시위를 선도해주리라 믿었던 민족대표들은 약속과 달리 인근의 식당 태화관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 온 겨레의 거사가 여기서 시작됐다.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옛 태화관 자리. 현재는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이 세워져 있다.

자칫 시위가 격렬해져 당초 목적한 평화시위 대신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인명피해가 날 것을 우려한 때문이라는 게 33인 민족대표 측의 설명이었다. 그들은 식당 안에서 자체적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경찰에 자진 신고하고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하지만 공원에 모인 이들에게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설립한 경신학교 출신인 정재용은 졸업 후 고향 해주에서 감리교회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조국 독립의 날이 찾아오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상경했지만 약속한 3월 1일 정오가 지나도록 공원에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 학생들 중심으로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지만 이들의 가슴에 불을 붙여줄 결정적인 촉매가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이대로 허망하게 끝낼 수는 없다는 조바심으로 더 이상 참지 못한 정재용은 자진해서 공원 한가운데 세워진 팔각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군악대의 연주장소로 높이 세운 이 건물에 올라서자 수많은 사람들의 눈길이 그에게 쏠렸다.

▲ 3·1운동 당시 탑골공원의 모습을 묘사한 부도.

품에는 잘 간직해둔 독립선언문이 들어있었다. 꺼내어 큰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 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낭독이 끝나자 만세함성과 함께 긴 행렬이 덕수궁 대한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 겨레의 거사, 3·1운동이 마침내 시작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서울에서 발원한 만세함성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평안도, 황해도 심지어 멀리 제주도까지 이어지며 한반도를 물들였다. 남녀노소,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다같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태극기 삼천리 만세강산.

● 1919년 3월 14일 조선총독부
3·1운동에 이어 청년학생들 중심의 3월 5일 봉기가 서울 시내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후, 한 주가 지나 승동교회 차상진 목사는 문성호를 대동하고 조선총독부를 찾아간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문서 하나가 들려있었다.

동료 목회자, 교우, 학생들이 조국 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에 앞장서다 체포되어 고초를 당하는 현실 속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 역시 애국신앙을 가진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차 목사가 몽양 여운형을 전도하여, 그가 차 목사보다 먼저 승동교회 조사로 섬긴 역사도 있다.

‘12인 등의 장서’라는 이름을 가진 문제의 문서는 차 목사 본인이 작성하고 안동교회 김백원 목사, 평북 의주교회 문일평 집사와 정주교회 조형균 장로 등 12명이 연서해 하세가와 당시 조선총독 앞으로 보내는 편지 형식의 격문이었다.

▲ 차상진 목사 등 기독교인들이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12인 등의 장서(승동교회 역사관 소장).

“지난 3월 1일 조선민족 대표 33인의 조선독립에 대한 선언서는 결코 몇 개인의 독단적 회결에서 나온바 아니요, 실로 전 조선민족의 양심적 요구임은 사실이 확증하며, 신명이 보증함을 우리들은 확신하노라. 이에 우리들은 그 후계자로 2천만의 요구와 주의를 대표하여, 그 요구와 주의를 관철코자 하노라.”

이렇게 시작되는 12인의 장서는 시종 당당하게 만세운동의 당위성과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한다. 차상진 목사가 총독부에 장서를 전달하는 동안, 김백원 목사를 비롯한 다른 인사들은 보신각 앞에서 이 문서를 낭독하며 널리 공포했다. 장서 전달과 함께 차 목사는 곧바로 체포되어, 김원벽 등과 함께 재판정에 서서 징역 8개월 선고를 받는다. 옥고를 치르며 건강을 잃은 그는 한 동안 목회일선에 복귀하지 못했다.

● 1919년 3월 18일 세브란스병원

일본 경찰이 세브란스병원 사택에 들이닥쳤다. 같은 날 정동교회와 승동교회에도 경찰의 수색이 벌어졌다. 3·1운동의 핵심 배후로 지목된 기독교계에 대한 일제의 본격적인 감시와 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한 달 후 2차 수색 때는 배재학당 이화학당 연희전문학교 등 기독교학교들과 교회지도자들의 가택까지 그 대상에 포함됐다.

만세운동의 여파로 교회는 당시 많은 것을 잃었다. 지도자들은 옥중에서 고초를 당하고 있었고, 일제의 견제로 교회를 찾아오던 발길들이 뚝 끊어졌다. 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5월말 통계에 의하면 장로교회의 숫자는 1년 전보다 188개가 줄었으며, 신자의 숫자는 1만여 명이나 감소했다. 감리교회도 그에 버금가는 피해를 입었다. 일제는 거기에 더하여 기독교의 포교를 제한하는 조선총독부령 제59호를 공포했다. 교인수가 3분의 1수준으로 떨어진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백성들의 신망을 얻은 한국교회는 이후로도 꾸준히 성장하며 지도력을 발휘했고, 해방이 오기까지 순교자와 교회·학교 폐쇄 같은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신사참배 반대운동 등을 통해 조국 독립을 위한 한 축으로서 당당히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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