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이 땅에 탄생하셨을 때 구유에 누우셨다. 예수님이 구유에 누우셨다는 것은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에 오시고 비천하게 오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헨리 나우엔은 예수님을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하였다.

왜냐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치유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이 땅에서 치유사역을 하는 사람까지도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널리 확대를 하였다.

그러나 그 위대한 헨리 나우엔도 보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미 구유에 오실 때부터 상처 입은 탄생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니, 상처 입은 탄생자를 넘어 그 분이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된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아기 예수님은 가장 낮고 비천한 곳으로 오셨다.

그러므로 금주는 낮은 곳에 오신 예수님을 명상해 보자. 그는 본체가 하나님이시고 신성을 가지셨지만 우리와 같은 아이로 오셨다. 신성을 가졌다고 해서 낳자마자 걸어 다녔다는 기록은 성경에 없다. 우리와 똑같이 우셨을 것이고 자라셨을 것이다.

이런 성육신의 신비를 누가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아이러니,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어느 물리학자, 어느 문인이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냥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명상해보자. 그리고 감격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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