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1786년에 기록된 ‘일성록’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옷차림은 신분의 귀천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까닭인지 근래 이것이 문란해져서 상민, 천민들이 갓을 쓰고 도포를 입는 것이 마치 조정의 관리나 선비와 같이한다. 진실로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심지어 시전 상인들이나 균역을 지는 상민들까지도 서로 양반이라고 부른다.” 이는 조선후기 신분질서가 문란해질 때의 모습이다.

당시 양반 가운데는 몰락해서 농업이나 상업, 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경제적으로 성장한 천민이나 상인 중에는 양반행세를 하는 자들이 흔해지고 있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서울에서는 조정의 관리였고 고을에서는 지주이자 선비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양반사회가 조선후기가 되면서 크게 변질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묘사한 글이 ‘양반전’이다. 양반 신분을 팔 수 밖에 없는 양반과 양반의 신분을 돈으로 살 수 있을 만큼 부를 축적한 양인 부자가 등장하는 내용이 양반전이다. 당시 정치경제적인 몰락으로 인해 평민이나 노비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양반이 즐비했고 평민들 중에는 양반 부럽지 않게 돈을 모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조선사회는 신분이 재력을 좌우하던 사회였다.

이렇게 신분제가 흔들린 것은 양반들이 자기 관리를 잘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즉 양반들의 자기도태 때문이었다. 그 시절 서울 경기의 귀족을 상징하는 일부 경화사족을 제외한 다수의 양반들은 정치권력에서 소외 되면서 그 지위를 상실하고 있었다. 향촌사회를 중심하여 문중조직을 강화해 자신들의 결속을 다지려 했지만, 부가 없는 상황에서 이런 조직의 유지는 허울에 불과했다.

서울 주변에서 성장한 경화사족들은 조선 후기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시골과 문화적 격차를 벌려나갔고, 청나라의 새로운 학문과 접하면서 관료로 입신,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정치에 관여할 수 없는 향촌 사회의 양반들은 향반이 되었다. 동반은 문과관리 서반은 무과관리인데, 여기에 오르지 못한 채 향반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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