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훈 목사의 초량이야기]

어떤 사회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문명의 발달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이 발명한 것 중에 위대한 둘을 꼽으라면 원(동그라미)과 계단이다.” 공감이 된다. 원을 통하여 바퀴가 만들어지고 이동에 있어서 속도와 편리함을 가져왔고, 계단을 통하여 높은 곳을 올라갈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초량에 이런 의미가 충분히 녹아있는 계단이 있으니, 이름 하여 ‘168계단’이다. 유치한 설명을 붙인다면 첫 계단을 밟으면서 마지막 발을 딛고 길가에 올라서기까지의 계단 숫자가 168개다.

실제로 올라가보면 아주 힘들다. 계단 경사각이 45도에 육박하고 수직 높이로 환산하면 아파트 7층 높이쯤 된다. 몸으로 느끼는 체감 경사각은 50도가 넘는 것 같다. 진땀이 나고 숨이 차고, 허약한 사람은 진이 다 빠진다.

오래 전부터 초량 원주민들에게는 168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시쳇말로 무릎관절이 다 나간다. 그래서 그런지 예부터 초량에 정형외과 차리면 떼돈 번다고들 했단다.

초량에는 왜 이렇게 절벽 같은 168계단이 만들어졌을까? 바야흐로 때는 1950년 후반, 먹고 살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부산으로 밀려왔고 초량을 점령한다. 초량은 맨 밑에서 시작하여 가장 높은 곳, 산 정상 부근까지 판잣집이 들어섰다. 그러면서 168계단이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초량 위쪽 산복도로 동네와 초량 아래쪽 동네를 연결하는 계단이었다. 이런 엄청난 계단의 생성 이유를 딱 하나만 말하라면, ‘생존의 절박함’ 때문이었다.

계단 밑으로, 지금은 하나만 남아 있지만 원래 우물이 3개 있었다고 한다. 물이 없으면 살 수 없었기에 어쩌면 우물이 있는 곳을 따라서 계단이 났을 것이다. 윗동네 사람들도 절벽 같은 168계단을 내려와서 가족들 마실 우물물을 길어 어깨에 메고 다시 올라갔다. 지금의 관광객에게는 재미 삼아 오르면서 셀카를 찍는 마냥 신기한 계단이지만, 그땐 생존을 위한 우물로 가던 계단이었다. 토박이 할매들 말에 의하면 이 계단에서 사람 여럿이 굴렀단다. 아무개 엄마도 굴렀고, 아무개 집 아이도 물지게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굴렀단다.

▲ 초량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매일 통과의례처럼 오르내린 168계단.

그리고 또 하나의 절박한 생존 이야기가 있다. 부산항에 배가 들어오고 부산역에 화물열차가 들어오면 초량의 아버지들은 달려가야만 했다. 가족들이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먼저 달려가서 지게꾼 자리를 차지해야만 했다. 그리곤 그 날 저녁, 아버지는 굵은 소금 친 간고등어 한 손과 아이들 먹일 건빵 몇 봉지 손에 들고 산동네 집을 향하여 다시 이 계단을 힘겹게 올랐던 것이다. 168계단은 산동네에서 부산항과 부산역으로 달려서 내려가는 지름길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발전을 이뤘다. 알고 있는가? 당시 부산항에 도착한 수출품의 많은 분량이 168계단을 달려내려왔던 초량동네 아버지들의 지게로 옮겨졌다는 것을. 그 시절 초량 사람들에게 168계단은 매일처럼 고통스러운 통과의례였고, 계단의 가파름은 삶의 가파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168계단은 희망의 계단이었다. 언젠가 가난과 고단함이 끝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168이라는 긴 숫자를 세면서 무릎 관절이 나가는 줄도 모르고 계단을 올랐던 것이다. 이제는 계단을 따라 모노레일이 놓였다. 버튼을 누르면 쉽게 올라가는 모노레일의 편안함과 편리함이 부디 168계단에 녹아있는 교훈을 지우지 않기를 바란다.

인생은 경사각 45도의 가파르고 긴 계단과 같고, 그 가파름 때문에 간절한 희망이 생기고, 그 희망은 성취를 위한 절박함이 꼭 필요하다는 것. 오늘도 168계단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지레 겁먹고 계단을 올라가는 수고 대신에 쉬운 모노레일을 기다린다. 살아보니, 쉽고 편한 것이 답이 아닐 때가 더 많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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