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정부와 사회는 물론 교단과 교계단체들도 3·1운동의 의미를 되새기는 여러 가지 사업들을 준비하고 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우리 교단도 3·1운동 기념사업을 준비하여 교단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3·1운동 당시 한국교회 성도들은 20만명 정도였다. 이는 1700만 인구의 1.5%에 불과했다. 당시 천도교의 교세가 200~300만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소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심 가담자와 투옥자들의 26%가 기독교인이었다. 민족대표로 서명한 33인 가운데 16명, 함께 재판을 받은 48명 가운데 22인이 기독교인이었다. 천도교, 불교와 비교할 때 소수였을 뿐만 아니라 후발종교였으나 사람들은 기독교를 민족의 대표종교라고 당연시했다.

학자들은 기독교가 3·1운동에서 대표성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를 영적 권위와 지도력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기독교는 1903년 원산부흥회를 시작으로 부흥운동을 전개하면서 이를 사회적 정화운동으로 확산시켰다. 일제 치하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다양한 노선과 방법으로 항일저항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3·1운동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대화와 타협, 희생과 양보의 정신을 실천했다.

3·1운동으로 우리 민족이 당한 희생은 혹독했다. 일제의 축소된 통계로 봐도 사망 7500여 명, 부상 1만6000여 명, 체포 4만6948명에 달했다. 기독교가 운동에 앞장선 댓가도 그에 비례해서 가혹했다. 장로교에서만 134명의 목사를 비롯해서 3804명이 체포됐고 사살된 자 41명, 매맞고 죽은 자 6명, 파괴된 교회당 12개 등에 이르렀다. 기독교 전체적으로 교회는 88개소, 신자는 무려 2만2409명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후 기독교는 3·1운동에서 얻은 신뢰와 전국적 조직망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건국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3·1운동 100주년은 한국교회가 영적 권위와 지도력을 회복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역사의 교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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