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목사(새에덴교회)

▲ 소강석목사(새에덴교회)

“당신이 이 땅에 오셨던 밤 / 이스라엘 밤하늘은 푸른 별들로 가득하고 / 저 멀리 페르시아의 박사들도 / 계시의 별을 따라 유대 땅까지 왔건만 / 우리의 눈에 그 별들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 얼마나 비워야 하겠습니까 / 얼마나 낮아져야 하겠습니까 / 얼마나 가슴 저려야 하겠습니까 /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캄캄하기만 한 밤 / 언제쯤 그 별빛을 비추어 주시겠습니까…(하략)”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아기 예수의 낮아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이스라엘, 특히 베들레헴의 집 구조는 2층에 게스트 룸이 있었고 1층에는 주인이 머무는 안방이 있었다. 그리고 안방 옆에 반지하의 구조로 곡식창고나 나귀, 염소, 양이 머무는 축사가 있었다. 당시 로마 압제 치하였기 때문에 말은 키우지 못했다. 그래서 곡식창고나 짐승이 거하는 곳에 구유가 있었다. 구유는 짐승들이 먹는 여물통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사관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당시 조그마한 외곽 동네에 무슨 여관이 있었겠는가. 이스라엘의 랍비 뿐만 아니라 성경학자들까지도 당시는 여관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는 마을의 게스트 룸까지 다 차서 짐승들이 사는 축사 같은 곳에서 자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고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이 얼마나 낮은 곳에 오시고 비천하게 오셨는가를 보여줬던 것이다.

우리는 성탄절이 되면 무조건 낮은 곳에 오신 주님, 비천하게 오신 주님을 생각해야 한다. 더 낮은 곳으로 가고 더 비천한 곳으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아기 예수를 만나야 한다. 그 아기 예수를 만날 때 예수님의 스스로 낮아짐과 겸손의 정신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 진정으로 시대와 사회와 소통하고 화해하며 화목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에덴의 동쪽처럼 온갖 미움과 질투, 분노와 증오의 가시덤불이 가득하지 않는가? 서로를 적폐라고 하고 가시로 찌르며 다투고 분열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저 천상의 보좌를 버리고 맨살의 아기 예수로 오신 예수님의 낮아짐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 낮아짐의 사랑으로 서로 화목을 이뤄야 한다.

미국 몬타나 주에 가면 빌링스라는 도시가 있는데 체스터 장군의 전쟁 기념관이 있다. 체스터 장군은 인디언을 정복하는 장군으로 아주 전설적인 사람이었다. 또한 그가 이끄는 기마병 역시 인디언을 몰아내고 점령하기로 아주 유명했다. 그런데 그 빌링스라는 곳에서 인디언을 점령하고 몰아내려다가 그만 인디언의 작전에 걸려들어서 단 한명도 남지 않고 다 죽음을 당했다. 그야말로 참혹하고 처절한 죽음의 패전이었다.

그 때까지 백인들의 정책은 인디언을 다 죽이고 몰아내는 정책이었다. 그런데 체스터 장군과 그의 기마병이 다 몰살당하는 것을 보고 백인들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인디언을 죽이고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겠구나. 인디언을 내쫓지 말고 함께 살아야겠어.” 그때부터 인디언 정책이 바뀌어서 미국 전역에 인디언 보호구역이 생겼다. 인디언을 죽이지 말고 보호하며 함께 사는 길을 택했다. 그런데 체스터 장군의 기념관 본관에 큰 글씨로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화목이 힘이다.”

그렇다. 오늘날 가정도, 교회도, 국가도 사랑과 화목이 힘이다. 그런데 우리가 화목하기 위해서는 먼저 낮아져야 한다. 서로 높아지려고 하면 절대로 화목할 수가 없다. 우리 교단은 더 그래야 한다. 올 한해 우리 교단은 적의와 다툼의 파문이 소용돌이쳤다. 물론 정의를 구현하고 교단을 개혁하기 위해서였지만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를 적폐라고 정죄하다 안타까운 파국을 맞이하기도 했지 않는가. 어쩌면 아무 승자도 없는 아픔과 상처의 잔해만 남지는 않았을까.

레미제라블의 자베르 경감은 정의도 지나치면 잔인함의 결과만 낳게 된다고 교훈한 지가 오래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교권에 대한 욕망의 포로가 되어 치고받고 싸우고 흠집을 잡아 적폐라고 비난해 왔지 않는가.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다시 낮은 곳에 오시는 주님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정호승도 첫눈은 이 땅의 가장 낮은 곳부터 내린다고 했지 않는가. 우리의 마음도 가장 낮은 곳으로 갔을 때 아기예수의 사랑과 섬김의 정신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서두에 소개했던 성탄축시를 이렇게 이어갔다. “평강의 왕으로 오셨던 아기 예수여 / 증오와 분노가 가득한 어두운 이 세상에 / 다시 맨살의 아기 예수로 오셔야 하겠나이다 / 촛불보다 더 밝고 / 유대 땅의 별들보다 더 따스한 마음으로 / 다시 오셔야 하겠나이다…(하략)”

과연 맨살의 아기 예수가 다시 오셔야 하겠는가. 아니다. 우리가 다시 낮은 곳으로 가면 된다. 거기서 예수 아기를 만날 때 모든 욕망을 버릴 수 있다. 우리 스스로도 자기비하와 겸손을 실천하며 마침내 성탄의 평화와 화목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 교단을 넘어 한국교회를 섬기며 세우는 퍼스트 무버의 교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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