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캐나다의 벤쿠버와 그 아래 있는 미국의 워싱턴 주 그리고 그 아래의 오래곤 주를 합쳐 ‘오래곤 컨트리’(Oregon Country)라고 부른다. 이는 독립 국가를 의미하는 명칭이 아닌 단순한 지역 이름으로, 미국과 영국은 오랫동안 영유권을 놓고 갈등을 빚는다. 1846년 위도 49도를 경계선으로 정한 미국과 영국은 오래곤 컨트리를 둘로 분할하는 데 합의한다. 이 협약으로 오래곤 컨트리의 북부는 캐나다가 소유했고 남부는 미국이 차지하였다.

미국 소유의 오래곤 컨트리는 또 다시 분할되어 오래곤 주와 워싱턴 주로 분할된다. 오래곤 컨트리에 처음 정착한 이가 선교사 제이슨 리(Jason Lee d. 1845)였다. 이 사람이 오래곤으로 오게 된 것은 인디언들의 초청 때문이었다. 1830년경 네 명의 인디언들은 미주리 주의 세인트 루이스까지 찾아와 성경을 가르쳐 줄 사람을 보내 달라고 요청한다. 1834년 목숨을 건 여정을 통해 제이슨 리가 찾은 오래곤은 참으로 광활한 땅이었다. 그는 이곳에 와서 첫 정착촌을 세우는데, 그곳이 ‘살렘’이었다.

오래곤의 살렘은 미국 서부 최초의 도시로서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와 워싱턴의 시애틀보다 먼저 세워진 도시로, 오래곤의 수도다. 제이슨 리는 미서부 최초의 대학인 윌라메트 대학을 세우면서 인디언 선교에 진력했으나 인디언 사역에서 큰 성과를 세우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제이슨 리의 사역은 오래곤 주 설립의 효시가 되었고 수많은 개척자들의 발길을 불러 모으게 된다. 지금도 오래곤 수도 살렘의 시청사에는 제이슨 리의 황금동상이 세워져 그의 개척자 정신을 웅변해주고 있다.

1837년 미국에는 대공황이 발생하여 10년의 경제위기를 가져왔고 수많은 공장과 회사가 도산하면서 실업자가 수백만에 달하였다. 당시 대공황은 ‘오래곤 열병’이라는 서부개척의 열망을 낳게 한다. 이 때 시작된 것이 오래곤 트레일을 이용하는 서부 대이동이었다. 동부에서 중부를 거쳐 로키산맥을 넘은 저들은 소네이크 강과 장엄한 컬럼비아 강을 따라 이어지면서 수많은 서부 정착촌을 탄생시켰다. 대이동길은 중부에서만도 3000킬로가 넘는 고된 길이었고 이 길에서 병사나 사고사로 수많은 이들이 주검에 이르렀다. 그 길은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희망의 길로, 황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간 것보다 더 먼저 농업을 위해서 간 희망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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