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복음으로 세상에 답하다 ⑨우리는 세계관 전쟁터에 살고 있다

타락한 본성을 따라 살다 영원한 죽음에 이르지 말고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영원한 자아성취에 이르러야

▲ 최재호 목사·대구성일교회·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Ph. D.(변증학)

지금까지 여덟 번에 걸친 글을 통하여 영적 전쟁터에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세계관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설명했다.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영적 기상도를 설명함으로써 전체 기고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세계관의 전쟁터에서 살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세계관의 영적 전쟁터에 던져진 존재들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든 영적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영적 전쟁에서 패배하면 영원한 멸망이다. 따라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행동원칙을 간단하게 정리 한다.

인생은 전쟁이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의 과정은 끊임없이 벌어지는 전쟁의 연속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신 세계에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파괴하고자 하는 세력이 침입하였다. 사탄이 하와를 유혹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불순종하게 만들었다. 아담과 하와가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타락한 이후에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창조세계의 존재 양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아담이 타락한 후에 인간과 모든 피조물들의 존재 양식을 결정하는 하나님의 징계가 창세기 3장 9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3장 13~15절은 불순종의 일차적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뱀과 하와에 대한 징계의 선포이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발생한 전쟁 상태를 선포한 창세기 3장 15절은 타락한 창조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양식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신 세계가 인간의 타락 후에는 전쟁터로 바뀌었다. 뱀과 하와 사이에 시작된 전쟁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으로 이어져서 인간 역사가 끝날 때까지 지속되는 전쟁이다. 그것도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에게 머리를 상하게 하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에게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치열한 전쟁이다.

영적 전쟁의 핵심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충동질하는 죄를 다스리는 것이다. 뱀이 하와를 유혹하면서 마음속에 불어넣은 욕망은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사탄이 불어넣은 불순종의 충동을 극복하지 못하고 죄를 짓고 말았다. 죄의 속성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신의 타락한 욕심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행동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계획을 부정하고, 항상 자기들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다.

죄가 인간의 마음을 장악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들었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파괴되는 것을 방치하시는 않는다. 하나님은 죄가 창조세계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죄의 세력을 억제하고 통제하신다. 뿐만 아니라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자를 보내셨다. 범죄한 세계와 인간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이미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약속하고 있다.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해서 죄악의 세력을 완전히 정복하고, 죄에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인간을 구원하신 여자의 후손은 다름 아닌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영적 전쟁의 구도에서 본다면 창세기 3장 15절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구원자가 오실 것을 예고하는 약속의 복음이라면, 요한복음 10장 10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을 구원할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음을 선포하는 성취의 복음이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가운데 살아가는 하나님의 피조물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침입한 약탈자 때문에 우리는 우주적 전쟁터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은 아니다. 발꿈치가 상하는 상처를 입을 수는 있지만,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적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한다.

영적 전쟁터의 행동 원칙

우리는 영적 전쟁터에 던져진 존재들이다. 전쟁을 피할 수 없다. 이왕에 치러야할 전쟁이라면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효과적으로 전투를 수행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전쟁에 참여하여 효과적으로 전투를 수행해야할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반드시 기억해야할 세 가지 실천적 원칙이 있다.

첫 번째는 인간은 실체의 창조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물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지적 능력과 도덕적 능력에 있어서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됐다. 그렇지만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선동하는 것처럼 인간은 스스로 충족한 자율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은 원본인 하나님을 떠나서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예를 든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휴대폰이 통화권을 이탈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을 스스로 충족한 자율적 존재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은 실체를 자유롭게 해석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창조자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거짓 선동에 불과하다.

두 번째 원칙은 진리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창조자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이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대단히 성급하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설명하자면, 절대 진리는 인간의 사색과 탐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인간에게 알려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실체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에 포함된 실체의 전체는 인간이 경험적인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크고 위대하다. 하나님의 계시의 영역을 벗어나서 실체를 이해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계시가 진리의 근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의 도움 없이는 결코 실체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질 수 없다. 근대 과학적 방법론에서 주장하는 인간의 이성이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주장하는 인간의 직관이나 감성으로는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세 번째 원칙은 인간은 죄로 인하여 타락한 존재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을 실체의 창조자라고 주장하고, 자율적 자아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하여 자기만족을 추구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아의 죽음과 파멸로 끝날 수밖에 없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자기모순의 가장 큰 원인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상태가 죄에 오염되지 아니하고 창조 때의 정상적인 상태라면 자아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자아성취를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범해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고 마음이 불순종 상태로 타락했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 의지와 본성으로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자아성취에 이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타락한 생각의 틀로 세상과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타락한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타락한 세계관에 의한 자율적인 해석이 아니라 타락한 세계관을 성경적 생각의 틀로 바꾸는 거듭남이 먼저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행위의 목적은 자아성취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자아성취는 하나님의 나라이다.(마 6:33)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을 위한 하나님의 성취된 계획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성취된 계획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청지기로 부름을 받았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대리자로 부름을 받은 청지기의 자아실현이다.

결론적으로, 영적 전쟁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도전은 양자택일이다. 자신의 타락한 본성을 따라 살아가다가 영원한 죽음에 이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하나님의 성취된 계획안에서 영원한 자아성취에 이를 것인가? 어떻게 살든, 그것은 각자의 자유이다. 그러나 각자의 삶에는 반드시 평가와 심판이 따른다. 나의 행동을 평가하는 최종적 평가자는 나 자신이 아니라 창조자 하나님이시다. 자신의 삶을 평가하는 기준은 자신의 욕심이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다. 때로는 귀찮고 힘들게 보여도 성경적 세계관을 따라 살아가야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인다면, 복음을 변증하는 사람이 아무리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복음을 설명해도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거듭남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설명하는 변증가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논리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호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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