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훈 목사의 초량이야기]

오래 전 이야기다. 부산 살던 한 녀석이 방학을 맞아 서울 친척집에 갔다. 서울이란 곳이 부산서 올라온 어린 촌놈(?)에겐 으리으리했다. 서울 사촌은 제 것도 아니면서 제 것인 양 한강 다리 자랑, 빌딩 자랑, 자동차 자랑을 늘어지게 하면서 기를 팍 죽였다. 자랑의 하이라이트는 집 가까이서 보이는 고속도로였는데 “봐, 우리 서울에는 고속도로도 있다”고 방점을 찍었다.

부산 촌놈은 이대로 당할 수 없다 싶었는지, 불타는 애향심으로 소리쳤다. “너흰 고속도로 있냐, 우린 산복도로 있어. 산 위에 길이 나서 차가 막 달려.” 산복도로의 정체를 모르는 서울 사촌은 찍소리 못하고 KO패당하고 말았단다.

산복도로는 말 그대로 ‘산복(山腹)’에 나있는 도로다. ‘복(腹)’은 ‘배’를 가리키는데 바로 산 중턱을 의미한다. 1964년 처음 개통이 되었고 지금도 초량 저 위쪽에는 산복도로가 길게 이어져있다. 중심이 초량이라 ‘초량 산복도로’지 실제로는 서구의 동대신동, 중구의 대청동과 영주동, 그리고 초량을 지나 수정동과 범일동, 진구의 범천동으로 쭉 이어져 있는데 길이가 약 10km 정도가 된다. 이 산복도로 위아래로 수많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자리를 잡고 있다.

산복도로의 탄생에는 나름 사연이 있다. 우선 부산이라는 도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부산하면 생각나는 것으로 해운대, 광안리, 태종대, 송도를 거론한다. 맞다. 모두 부산에 있는 바다다. 하지만 부산(釜山)이라는 지명을 곰곰이 살펴보라. 바다 냄새는 없고 ‘산(山)’이 핵심이다.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헐떡이며 달려오다가 기운을 다하면서 작은 새끼 산들을 만들어 놓고는 마침표를 찍은 곳이 부산이다.

‘부(釜)’는 ‘솥’을 의미하는 글자다. 그러니 부산은 크지는 않지만 많은 산들이 솥단지처럼 놓여진 곳이다. 하지만 여기저기에 있던 솥단지 산들은 집 짓고 길 낸다고 사라졌고, 조금 높은 산들은 목숨을 부지한 채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이렇게 부산의 지형적 특징이 산이었으니, 평지가 좁고 적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부산항이 개항하면서 인구가 많아졌다. 초량 주변의 평지가 주로 일본인 거주 구역으로 사용된 데 반해, 부산에 온 부두 노동자들과 외지인들은 있을 곳이 없으니 초량의 산자락을 따라서 집을 만들어야만 했다. 물론 대부분 무허가 판자촌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판자촌은 산자락을 따라서 점점 고도를 높이며 올라갔다.

▲ 부산 초량동의 역사를 소개하는 ‘이바구공작소’에 전시된 산복도로의 옛 모습.

결정적으로 초량 구봉산 거의 꼭대기까지 판자촌이 들어서게 된 것은 한국전쟁 때문이었는데, 피난민들은 살기 위해 산을 점령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도 산자락에서 산꼭대기까지 펼쳐진 판자촌은 정리되지 못했는데, 신발산업을 중심으로 부산에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또 한 번의 생존난민(?)들이 밀려와 초량 산동네를 물려받았기 때문이었다.

크루즈 여행을 왔던 외국인들이 밤에 부산항 바다에서 산복도로주변을 비치는 야경을 보고 ‘원더풀’을 외쳤단다. 그런데 대낮에 직접 찾아가 봤더니 간밤에 홀렸던 환상이 깨졌다는 일화도 있다. 산복도로는 관광을 위해 만든 길이 아니라 아픈 역사가 만든 흔적이다. 그 시절 우리네 부모들이 그래도 살아보려고 했던 처절한 자국이다.

초량을 중심으로 10km 정도 계속 되는 일곱 여덟 개의 산마다 집들이 들어서고 동네가 만들어졌다. 산동네와 산동네를 잇기 위해 만들어진 길이 바로 ‘산복도로’다. 산복도로의 정신은 ‘이음’ 혹은 ‘이어짐’이다. 너와 나를 잇자. 이어짐은 소통이요, 흐름이요, 순환이다. 그래서 그 고단했던 시절에도 초량 사람들은 산복도로를 통하여 너와 나를 이어가면서 함께 울고 웃으면서 고단한 삶을 살아냈던 것이다.

너보다 빨라야 하는 ‘속도’의 고속도로에서는 ‘외로운 나’ 혼자만 덩그러니 있겠지만, ‘이음’의 산복도로에서는 ‘우리’라는 게 있다. 이런 의미에서 ‘너흰 고속도로 있냐, 우린 산복도로 있다’는 허세는 어쩌면 우리사회에 꼭 필요한, 참 옳은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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