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설교②]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눅 4:16~21)
[성탄설교②]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눅 4:16~21)
  • 호용한 목사(옥수중앙교회)
  • 승인 2018.12.04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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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용한 목사(옥수중앙교회)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눅 4:16)

▲ 호용한 목사(옥수중앙교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그 시대는 참으로 암울하고 어둡던 시기였습니다. 정치, 종교, 문화 모든 것이 썩지 않은 데가 없었습니다. 로마 군대의 힘으로 힘없는 민중들을 폭압하던 때였습니다. 타락한 권력에 빌붙어 어떻게 하면 내 힘을 키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재산을 늘릴 수 있을까? 하며 갖은 만행을 저지르던 시대였습니다. 헤롯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베들레헴의 모든 아기를 다 살해했던, 그 끔찍한 사건이 대표적 예입니다.

종교마저도 타락하여 바리새인들이 활개를 치던 시대였습니다. 위선과 탐욕이 가득하여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이들을 율법으로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오셨는데도, 오히려 그 분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니 힘없고 가난한 자들은 여기에 치이고 저기에 치여 의지할 데를 찾지 못했습니다. 앞이 캄캄해서 그 어떤 빛 하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암흑의 시대 중심에서 오늘의 말씀이 나사렛 회당에서 울려 퍼진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18~19절).

예수님이 가르치신 이 말씀에 대해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과연 이렇게 놀라운 일이 벌어질 수나 있을까? 에이, 이 말씀은 그냥 종교적인 수식어이지, 실제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며, 별 기대나 소망 없이 이사야의 예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깜짝 놀랄만한 발언이 이어집니다.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0~21절).

눈이 있다면 이것은 정신이 나간 소리입니다. 귀가 있다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아니 도대체 주위 어디를 둘러봐서 이 예언이 응하였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그 예언은 진실로 그대로 응하였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그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가난하여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자에게 예수님은 찾아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잊지 않고 돌보고 계심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시면 더 이상 가난이 나에게 굴레가 되지 않고, 가난한 것 때문에 주눅 들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가면 질병이 더 이상 우리를 붙잡아 매질 못합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가면 사망이 더 이상 우리의 주인 노릇을 못합니다. 우리가 병에 걸려 고통당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음하면 하나님도 신음하십니다. 우리의 죄성과 우리의 악함으로 이 땅에 질병을 가져오고 사망을 가져온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고 죽음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영원히 저주받을 원수일 뿐입니다. 예수 부활의 능력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다시 살리는 것, 영원히 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병상 중에서라도, 죽음을 앞두고서도 예수 안에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은 정작 그 복음을 전해야 할 우리 자신이 그 복음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더욱 커지고, 더욱 많아지고, 더욱 부유해졌건만,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 누군가 좀 초라하게 차려입고 교회당 문턱을 밟기라도 한다면 우리들은 과연 그들을 향해 어떤 태도로 다가가고 있습니까?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을 향해 달려가던 무렵 일본의 오노다 히로 소위는 필리핀의 루방 섬에서 정보장교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상관으로부터 받은 명령은 단순했습니다. “절대로 항복하지 말고 이곳을 지켜라.” 미군이 함포 사격 지원을 받으며 루방 섬을 상륙해 오자, 일본군은 크게 패하고 밀림 속으로 후퇴하였습니다. 1945년 8월, 일왕이 항복을 선언하자 미군은 이 사실을 삐라를 통해 밀림 속에 숨어 들어간 일본 패잔병들에게 알렸습니다. 많은 패잔병들이 무기를 버리고 투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노다 소위와 그의 부하 2명만큼은 모든 것이 미군의 계략이라 여기고는 투항을 거부하였습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이미 일본은 패망하였고 전쟁이 끝이 났다는 것을 계속 알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오노다 소위의 형제를 루방 섬에 급파하여 설득을 시도했지만, 오노다 소위는 이마저도 미군이 자신의 가족까지 동원하여 항복을 받아내려는 계략으로 여길 뿐이었습니다. 오노다 소위의 부하 하나는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고, 남은 부하마저도 몇 년 뒤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노다 소위는 개의치 않고 단신으로 유격전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렇게 오노다 소위는 세간으로부터 잊혀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즈끼 노리오라는 한 대학생이 잊혀가는 이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스즈끼는 필리핀의 루방 섬으로 날아가 어딘가 숨어있을 오노다 소위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즈끼는 아직도 군인의 눈빛이 퍼렇게 서려있는 오노다 소위를 찾게 됩니다. 처음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스즈끼로부터 그간의 일본의 상황에 대해 침착하게 설명을 듣고 나서야 오노다 소위는 일본의 패망을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그는 옛 직속상관으로부터 투항명령서를 직접 받고 나서야 투항하였고, 전쟁이 끝난 지 29년만인 1974년에서야 일본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났다는 좋은 소식을 아무리 전해줘도 믿지 않던 패잔병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울림을 줍니다. ‘복음’이란 좋은 소식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영원토록 고통 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누군가 살길을 열어놓았다고 알려주는 좋은 소식입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아무리 알려줘도 듣지를 않습니다. 그 소식을 들어도 믿지를 않습니다. 마치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아무리 전해주어도 믿지 않고 밀림 속에서 29년의 세월을 보냈던 오노다 소위처럼 그 기쁜 소식을 듣지도 않습니다. 듣는다 하더라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는 오노다 소위를 향해 계속해서 확성기로 소리 지르고 삐라를 뿌린다고 되겠습니까? 우리끼리 모여서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예수 믿으니 참 좋다고 나누면 되겠습니까? 더이상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을 향해, 아니 더이상 우리의 말을 들을 수 없게 되어버린 이들을 향해 다가가야 합니다. 대학생에 불과했던 스즈끼가 밀림 섬에 직접 가서 오노다 소위를 찾아 나섰던 것처럼, 우리도 복음이 필요한 자들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은 전단지로 만들어서 뿌리거나 확성기로 소리 질러대는 것이라기보다는, 말해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에게,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에게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찾을 능력도 없고 하나님을 찾을 생각도 못하는, 그리하여 죄와 사망의 저주 가운데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와 주셨던 것처럼, 복음은 그 복된 소식은 친히 들고 그 자리에까지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생필품 등을 사 들고 매달 어려운 분들을 찾아가는 불신 장애우 나눔 사역을 지난 5년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가정당 5~6만원 물품을 20가정씩 매월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분들 집에 한번 찾아가 보면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남루한 방에 들어가면 앉아 있어야 하나, 서 있어야 하나,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참으로 난감해집니다. “할머니, 식사를 잘 하셔야 건강해요” 하면, “이가 아파서 뭘 못 먹어”라고 합니다. “그럼 병원에 가셔야지요” 하면, “다리가 아파서 잘 가지도 못해.” “그럼 다리 낫는 약을 드셔야지요”라고 하면, “약값이 비싸서 못 사 먹어”라 합니다. 뭐 이런 식으로 대화하다 보면, 몇 마디 못 가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럼 자연스레 ‘같은 자리에 있어서 불편하다, 그냥 서로 따로 사는 게 편하겠구나, 서로를 위해서 각자의 자리에서 사는 게 최선이겠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러나 복음이 무엇입니까? 저주 받은 자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 자리에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까? 일단은 우리가 그 자리에 가야합니다. 그 자리에 계속해서 가야 이웃이 되고, 할 말이 없지만 자꾸 말을 주고받아야 할 말이 생기는 것이지요. 자꾸 얼굴 보고, 자꾸 만나야 서로에게 이웃이 되는 것이지요. 그저 구호품 몇 개 어쩌다 한 번 던져주는 것으로 이웃이 될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복음을 들고 더 가까이 그들에게 들어가야 합니다. 그저 교회당 안에서만 하나님나라, 하나님의 복음을 외치지 말고 그 위대한 나라를 우리의 가슴에 품고 그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곧 연말입니다. 날이 많이 추워집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자들이 더욱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암흑의 시대에 친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처럼, 우리에게 주신 그 복음대로 삽시다. 복음이 필요한 그 자리에 복음을 들고 찾아 갑시다. 그들에게 선한 이웃이 되어 줍시다. 그리하면 하나님나라는 지금 여기에 임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참으로 복된 성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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