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건 목사(동홍교회)

▲ 박창건 목사(동홍교회)

중국이 경제력 상승으로 G2로 부상하더니 미국과 무역마찰의 여파가 각 나라로 미치고 있다. 날이 갈수록 나라 안팎의 경쟁도 심해가는 게 현실이다. 그간 대학입시가 경쟁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 옛날이야기 같이 되어버렸고, 이제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경쟁의 연속이다. 유치원 입학부터 꼭두새벽에 덜덜 떨며 표를 받는가 하면 졸업 후 직장에 들어가기 위한 취직 시험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언제부턴가 공무원이 철밥통이라고, 고시원에서 기약 없는 세월을 보내는 젊은이가 한 둘이 아니다. 이렇듯 싸워야 자리를 잡고 이겨야 대접 받는 게 현대의 흐름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자신을 낮추시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볼 때 사뭇 다른 반면, 죄에 빠진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성향이 있다. 끝없이 높아지려는 야심과 탐욕으로 얼룩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성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리더가 온화한 성품보다는 폭언과 갑질로 안하무인이 되는 경우가 빈번해 좋은 관계의 훈훈한 사회를 살벌하게 만들어버린다.

오늘날 국내 정치현실만 보아도 여야가 정책으로 대안을 세우려하기보다 승기를 잡으려는 정쟁 일변도의 자세는 급기야 정기국회의 국가예산도 법정시한마저 넘기고야 말았다. 이런 모습은 한국교회 또한 예외가 아닌 것 같다. 교계의 연합 사업 또한 상호존중과 기회균등의 역할 분담이 매우 중요한 덕목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연합운동은 십자가 정신의 섬김과 희생에 합당한 품격을 높여 사회에서 향도 역할을 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특정한 교단이 한 기관에 장기집권으로 독주하게 되면 연합사역 의미 자체가 퇴색될 수 있고, 나아가 연합에 금이 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결부하여 한 해가 마무리되는 12월에 메시아로 오신 아기 예수 탄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성탄의 복음적 의미는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비하의 사건이요, 한 알의 밀알로 오셔서 썩어 생명을 희생하신 아가페의 역사인 것이다. 이는 낮아짐의 사건이고 희생의 섬김이다. 연일 터져 나오는 갑질, 왕따, 성폭력 사건이 우리의 가슴을 멍들게 한다. 지위를 이용해서 딸 같은 여성을 강제로 성폭행했어도 이 세상 법 논리로 무죄를 선언하는 게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형 에서와 형제애도 뒤로 하고 야반도주한 야곱이 외삼촌의 집에 가서 셈에 능한 어른 라반으로부터 수많은 재물을 챙겨 금의환향하는 길에 하나님을 만나 씨름하는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토록 이기고 빼앗는 연승가도를 달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에는 평화와 안식이 불가능했음을 보여주지 않는가! 오로지 이기기만을 꾀하다가 중독이 되어 버리면 본질적 가치조차 깨닫지 못하고 비극의 종말을 맞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지나치게 강성으로 비춰지고 고집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아름답지 않고 신자다운 자세도 아니다. 흠과 티가 없으신 분임에도 죄인들과 함께하며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섬김의 도를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셨다.

높은 학문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작은 자로 자처하며 죄인 중의 괴수로 몸을 낮춘 바울 또한 참 제자로 섬김의 도를 나타냈다. 바울은 약한 자에게 약한 자와 같이 됨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라 하였다. 일상의 관계 속에서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울어주고 웃어주는 삶은 이김이 아닌 섬김과 희생의 삶으로 그는 자신을 쳐 복종하게 함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요즘 세상에서 승승장구 성공했다는 분들을 대하기에 불편할 때가 있다. 한 시대를 살아가며 격 없이 허심탄회한 대화 상대를 찾기가 쉽지 않음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장마철에 물이 그렇게 많아도 정작 마실 물이 없다 했듯이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군중 속의 고독으로 외로운 혼밥족이 늘어감은 교회가 해야 할 사역이 여기에 있음을 또한 느끼게 한다.

대외적으로 떳떳하지 못해서였을까, 사람은 들어설 때도 잘 해야 하지만 물러설 때 뒷자리가 깨끗해야 한다. 총신대 총동창회에서 김영우 총장을 동문 명단에서 제명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분 또한 승부사 기질이 있어, 이기고 또 이겨 연승행진을 하는 듯하더니 결국 영어의 몸이 되었다.

현실 속에서 고집스럽게 이기기만을 좋아하는 자는 꼭 이겨야 할 최후의 순간에 패함을 마음에 새기자!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최후 승리의 궁극적 가치를 향해 초지일관 달렸다. 이기기만을 좋아하는 자는 반드시 패한다는 ‘호승자필패’의 교훈을 새기며 우리는 예수 안에서 복음의 본질을 향해 아름다운 패배를 때때로 감수하자. 내려놓을 수 있는 너그러움의 관용은 지는 듯하나 결국 영광의 길이요 진정한 승리의 길이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