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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파괴적 쾌락 위해 창조주 하나님을 해체한다[특별기고] 복음으로 세상에 답하다 ⑦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관적 도전은 무엇인가

포스트모더니즘 삶의 원리는 ‘순간적 감정 만족’ …
뱀의 유혹처럼 매혹적이지만 창조주 자리에 자신을 대체할 뿐

▲ 최재호 목사·대구성일교회·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Ph. D.(변증학)

이전 글에서 죄로 뒤틀린 세계관을 리모델링할 이유를 설명했다. 이번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관적 도전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오어와 카이퍼가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세계관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화되고 더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세계관적 도전은 모더니즘이라는 무신론적 세계관이 약간 변종되어 나타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후현대주의)의 도전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은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라 인간 주권에 기초한 반기독교적인 무신론적 세계관이라는 면에서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이 둘 사이에 차이점은 모더니즘이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인간중심적 무신론의 세계관이라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감성에 기초한 무신론의 세계관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주장하는 세계관적 도전을 세 가지로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초월적이고 객관적인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에 의하면, 역사적 상황을 초월하는 객관적인 질서나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은 모든 질서와 제도는 삶의 상황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에 편리한대로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 안에서 생성되고 발전하고 소멸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율적인 자아가 주관적인 판단에 근거한 해석을 통하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모든 제도나 질서의 창조자가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초월적인 존재나 객관적인 질서는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주관적인 목적을 가지고 다른 집단이나 개인을 억압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존재나 질서에 관한 이론들은 외형적으로는 그럴싸한 구조와 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 근본적인 기초에는 억압을 위한 힘의 논리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초월적인 존재나 객관적인 질서와 제도는 억압을 위해서 특정한 집단이 만들어낸 체계에 불과하기 때문에 모두가 해체의 대상이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본다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창조자 하나님과 창조질서도 억압을 위해서 만들어진 구조물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체의 대상이다. 실제로 사탄은 하와를 그렇게 유혹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게 만들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는 사탄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령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억압의 음모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무신론 세계관이 하나님을 해체 대상으로 삼는 것은 역사를 통하여 일관되게 등장한다.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혁명에서는 “하나님도 없고, 주인도 없다(No God, No Master)”는 구호로 등장하였고, 1968년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68혁명에서는 “모든 금지를 금지하라”는 구호로 등장하였다.

둘째, 인간이 언어로 세상을 창조한다.

초월적이고 객관적인 사물이나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은 ‘인간이 모든 실체의 창조자’라는 근본적인 전제를 기초로 하고 있다. ‘인간이 모든 실체의 창조자’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니체의 철학이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의 허무주의는 서양철학이 주도하고 있는 인간 이성에 근거하여 세워진 기존의 신념체계를 철저하게 해체한다. 기존의 신념체계를 해체하고 나면 사물을 바라보는 관찰자(독자)의 관점만 남게 된다. 특정한 사물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하나의 의미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관점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가 존재하게 된다.

독자가 본문을 읽고 해석하듯이 모든 사물의 존재 양식도 그것을 만나고 경험하는 자아(self)의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세계는 무한정의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본문(text)들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서 사물들을 해석하고 의미를 재구성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것들을 만나고 경험하는 독자(관찰자)의 몫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세상의 창조자(저자)로 등극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주어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에 더이상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계시의 말씀이 인간행동을 규정하는 법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관계없이 인간 스스로가 자기의 존재양식을 결정한다. 이런 주장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가 성적 자기결정권이다. 남자와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사회적 제도와 질서를 만드는 주체이다. 자신의 선택권에 따라서 남성과 여성을 결정할 수 있는 성전환이 가능하다. 성(sex)도 생물학적인 남성과 여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사회적 성별(gender)이 존재한다. 동성애와 동성혼도 각자의 성적 취향에 따라서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다. 자신의 주관적인 결정을 반대하거나 억압하는 제도나 신념의 체계가 있다면 그것은 억압을 위한 도구로 체계화된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해체되어야 한다.

셋째, 진실은 억압받는 자의 주관적 감정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주장에 의하면, 진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받는 자의 주관적 경험과 감정이다. 자아실현을 위해서는 억압받는 자아의 욕구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외부적인 규범에 구애됨이 자신의 욕구와 감정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면 자유가 주어진 것이며, 자유로운 선택이 불가능하면 개인의 자유는 억압된 것이다. 행동의 옳고 그름은 전적으로 자신의 주관적 감정에 근거한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즐겁게 만드는 선택은 옳은 것이며, 자신의 감정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악한 것이며 해체의 대상이다. 억압을 경험하는 주관적 감정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가치판단의 기준이라는 주장은 적어도 두 가지 형태의 사회적 문화적 현상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는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차별금지’라는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난다. 차별금지라는 사회적 현상은 치밀한 전략 단계를 거쳐서 구체적으로 실행된다. 처음에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 대해서 관용과 포용을 주장한다. 그 다음에는 법적 평등과 기회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법적으로 차별을 금지하는 입법 활동을 하게 된다. 차별금지가 법제화되면 정당한 비판과 평가도 증오의 표현들로 억압받게 된다. 이렇게 되면 억압당했다고 생각하는 소수자가 가해자라고 생각되는 다수의 다른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차별하고 억압하는 심각한 역차별이 발생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 되면 차별금지법은 결과적으로 복음을 억압하고 박해하는 도구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에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ial correctness)’은 성소수자가 느끼는 감정은 진실이며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수자가 느끼는 주관적 경험과 인식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인종, 종교, 성적 취향, 외모 등에 대해서 어떤 말도 자유롭게 할 수 없다. 억압당한다고 생각하는 소수자의 주관적 감정이 그 외의 다수의 생각과 감정을 억압하는 가해자로 작용하는 심각하고도 폭력적인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자신의 감정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쾌락을 추구하는 문화적 현상으로 나타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주장하는 도덕성은 주관적 욕망의 문제이다. 나는 나의 욕망에 충실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나의 욕망과 선택을 비판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주관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을 충족시킴으로 느낄 수 있는 자신의 즐거움이 포스트모던 세계관이 주장하는 도덕적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절대 기준이다.

이런 욕구가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 소비자 중심적 쾌락주의이다. 소비자 중심적 쾌락주의는 소비를 통한 즐거움이 자아를 성취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모든 사물이 의미를 전달하는 본문이다’라고 주장하듯이 ‘모든 사물이 소비의 대상이다’라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생각하는 소비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사물이나 개념은 아무 것도 없다. 그들에게는 하나님도 자기의 감정을 위로하기 위한 소비의 대상이며, 교회도 몸도 자신의 쾌락을 위한 소비의 대상이다. 감각적이고 외형적인 경험을 중시하는 소비자 중심적 쾌락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소비 품목은 인간의 몸이다. 이런 배경에서 소비의 한 방편으로써 감각적 쾌락을 즐기려는 파괴적이고 문란한 성문화가 번창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혹하고 충동질하는 삶의 원리는 ‘지금 이 순간 나의 감정을 즐겁게 하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이 원리의 뿌리에는 자신의 주관적 감정이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며, 자아가 의미의 창조자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것은 마치 죽음은 숨기고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고 창조자 하나님의 권리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즐기라는 뱀의 유혹처럼 매력적이다. 포스트모던 세계관 속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자아가 주관적인 감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하나님은 창조자가 아니라 인간의 피조물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창조자 하나님을 해체하고 자신의 감정을 즐겁게 해주는 애완동물 수준의 하나님을 만들어서 섬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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