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훈 목사의 초량이야기]

“잠시 후, 열차는 종착역인 초량에 도착하겠습니다.”

어렸을 적에 기차 한 번 타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나는 적어도 KTX를 탈 때마다 나의 호강과 조국의 번영과 무사한 도착에 감사한다. 친절하게도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승객여러분, 잠시 후 이 열차의 종착역인 부산역에 도착하니 잊으신 물건은 없는지 잘 살펴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옛날엔 지금 경부선 열차의 종착이 ‘초량역’이었다. 그때의 버전으로 하면 “한성(漢城)에서 출발한 우리 열차는 잠시 후, 종착역인 초량역에 도착합니다” 이랬을 것이다.

부산역의 지번(地番)이 초량동 1187번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초량은 부산의 시작이었고 중심이었다. 만약 여러분이 부산역에 도착하셨다면 그것은 초량에 오신 것이다. 원래 경부선 철도는 1905년에 441.7km의 길이로 ‘서울-초량’ 간에 개통되었다. 부산역이라는 이름으로는 1908년부터 업무가 시작되었다.

오늘날 부산역은 크고 화려하다. 겉모양은 옛날 만화책에 나오는 우주정거장 같다. 지하 1층, 지상 5층의 역사 안에 에스컬레이터가 10대, 엘리베이터가 11대 운행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친구 혹은 가족들과 함께 캐리어 가방을 끌고서 쏟아져 나온다. 이들을 잡기 위하여 부산역 앞과 옆에는 택시들이 하루 종일 길게 줄을 서 있으니 대단하다. 참 좋은 기차요, 참 좋은 나라요, 참 좋은 세월이다. 참 감사하다.

‘부산역’하면 무엇일까? 어떤 옹고집 역사가는 ‘부산역하면 아픔의 철도다’라고 정의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일제강점기와 6·25 한국전쟁 때문이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침탈하면서 막말로 ‘땅 빼놓고는 전부’를 빼앗아갔다. 식량과 광물을 빼앗아갔다. 소와 가축들을 빼앗아갔다. 강원도와 경상도의 준령에서 자란 좋은 나무들을 벌목하여 빼앗아갔다. 이 모든 탈취물의 마지막 창구가 부산역이었다. 부산역에서 하역을 마친 우리의 백성과 소와 곡물들이 울면서 태평양을 건너갔다. 그 마지막 눈물을 바친 곳이 부산역이었다.

▲ 수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부산역의 옛 모습과 현재의 모습.

부산역이 아픔의 철도인 또 하나의 이유는 한국전쟁이다.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우리는 두려움과 혼란에 싸였고, 생존을 위하여 피난을 떠나야만 했다. 피난의 원칙은 딱 하나였으니 ‘될 수 있는 한 멀리 가는 것'이었다. 거기가 부산이요, 그 마지막이 부산역이었다. 이것으로 부산은 졸지에 서울 다음 가는 제2의 도시라는 은메달을 차지하게 되었다.

여기서 멈추질 않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살아보려고 어시장과 작은 공장들이 있는 부산으로 몰려왔다. 이렇게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는 만남과 이별, 이별과 만남이 반복되었으니 그 끝과 시작이 부산역이었다.

휴전 직후인 1954년 가수 남인수씨가 불러서 히트한 노래가 ‘이별의 부산정거장’이다. 돌아가신 제 아버지가 즐겨 불렀던 가락이기도 하다. 피난시절에 서울청년이 부산까지 와서 생활하며 한 부산아가씨를 만나 사랑했는데 휴전이 되면서 청년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들이 부산역에서 맞는 이별의 애절한 장면을 노래한 것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별의 부산정거장’ 가사에 공감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 모든 눈물을 묵묵히 지켜봤던 곳이 부산역이었다.

초량에 있는 부산역의 아픈 눈물을 아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알려고 하지 않는다. 눈물대신에 밀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여행객들의 웃음소리와 이야기소리가 역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또 한 쪽엔 지워지지 않는 추억과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잊어보려는 듯 깡소주를 마신 홈리스(homeless)들이 퀭한 눈으로 광장을 거닐고 있다. 나는 눈치 챘다.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옆을 지나갈 때면 그들의 술주정은 더욱 날카로워진다는 것을.

수문 앞 광장에 섰던 에스라의 바람처럼, 이제 부산역이 우리나라와 개개인의 모든 슬픈 눈물이 끝나는 진짜 종점이 되면 좋겠다. 그래서 부산역 광장에 예수님이 필요하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표 끊으러’ 부산역에 가지만, 우리는 어둠의 ‘결박 끊으러’ 부산역에 간다. 예수님만이 소망의 열차가 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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