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흥종 목사 누구인가

 

▲ 광신대학교에서 열린 오방 최홍종 목사 기념포럼에서 주제발표가 진행되는 모습.

광신대학교 새에덴교회 한민족평화나눔재단 등이 함께 마련한 오방 최흥종 목사 기념포럼이 11월 16일 광신대학교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이번 포럼은 광주 출신 최초의 한국인 목사이자 사회·교육운동의 선각자였던 최흥종의 삶과 사역을 돌아보며, 오늘날 한국교회가 직면한 문제들의 해법을 모색한 시간이었다. 본 지면에서는 포럼에서 소개된 주제발표와 학술발표회의 요지와, 최홍종 목사의 생애에 대해 소개한다. <편집자 주>

▲ 최흥종 목사

최흥종 목사 누구인가

1880년 5월 2일 광주시 불로동에서 태어난 최흥종은 젊어서 ‘최망치’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알아주는 싸움꾼이었다. 1904년 성탄절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유진벨(한국명 배유지)을 만나 기독교인이 된 후, 그는 원래 이름 최영종에서 최흥종으로 개명한다.

1905년 순검이 되고서도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서고, 일본경찰에 체포된 광주·전남지역 의병들을 몰래 풀어주거나 사전에 정보를 알리는 등 애국활동을 벌이던 그는 결국 사직하고 1908년부터 본격적으로 선교사들을 돕는 사역을 시작한다.

의료선교사 윌슨을 도와 어학선생 역할과 광주제중원 직원 역할을 감당하다, 한센인들을 위해 헌신한 포사이드 선교사를 만나 한국 최초 나환자요양소 개설 등 환자들을 돌보고 권익을 보호하는 사업에 적극 나서며 ‘한센인의 친구’로 불린다. 1933년 한센인 500명을 이끌고 11일간 ‘구라대행진’을 벌이며 우가끼 조선총독을 면담한 사건은 널리 알려져 있다.

1912년 북문안교회 초대 장로로 장립된 후, 최흥종은 2년 뒤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광주 출신 최초의 목사가 된다. 광주YMCA 창설, 광주유치원 설립, 일본산 마약퇴치 운동을 위한 모루히네방독회 설립, 여성 문맹 해소를 위한 한글야학반 운영 등에도 기여한다.

이후 시베리아 선교사, 제주 모슬포교회 담임목사 등을 역임한 최흥종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와 이에 굴복한 교회지도자들에 맞서기도 한다. 해방 후에도 전남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직을 수행하고, 농촌지도자 양성을 위한 삼애학원과 한센병자 자활촌인 나주 호혜원 등을 설립하는 등 왕성히 활동하던 그는 1966년 86세로 별세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1962년 국민훈장을 수여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한다.

 

“이웃사랑 없이 허공 치는 징 되지 말라”

주제발표/ 한국교회를 향한 오방의 경고

▲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뿌리를 견고하게 내리려는 찰나에 닥친 가장 큰 시련으로서, 한국교회에 엄청난 위기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강압적인 통치 속에서도 오직 살아계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며 신앙의 지조를 꿋꿋하게 지키고 버틴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미국 남장로교에서 호남지역에 파송을 받은 꿋꿋한 선교사들은 학교를 자진 폐교하면서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특별히 조선기독교연합회의 지도자들이 정치적으로 세상과 타협하는 비겁한 만행을 목격하며, 의분을 일으킨 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오방 최흥종 목사였다. 그는 일제에 타협해버린 교역자들의 반성과 평신도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의 호소문을 1937년 4월 1일 <성서조선>에 실었다. 글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교회지도자들은 순진한 양의 젖과 털을 빼앗아 자기 배를 채우는 삯꾼…자기들의 사리사욕만 채운다…아가페적 이웃사랑을 실천하려는 진정한 노력은 볼 수 없고 징과 꽹과리 같이 허공을 치는 것뿐이다.”

이러한 최흥종 목사의 강한 외침은 비단 1937년 당시의 지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교회가 비난받고 공격받는 우리 시대에 특히 최흥종 목사의 외침은 가슴 절절하게 받아들여야 할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오늘날 교계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증거하는 순수한 목자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그리고 정말 세상과 시대가 요구하는 교회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지, 아니면 시대의 요구를 외면한 채 종교적 카르텔을 형성하고 성을 쌓고 있지는 않은지 한국교회의 자화상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얼핏 보면 오방 최흥종 목사의 외침이 너무 돌출적이고 독선적인 외침인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는 몸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한 한센인들의 아버지였다. 그는 포사이트(한국명 보위렴) 선교사로부터 정신적, 영적 영향력을 받았다. 두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소외계층과 함께 나누고, 취약계층들과 공유하는 실천적 삶을 살았던 분들이다. 그렇게 살면서 신앙의 순수성을 버리고 시류와 타협하며 정치꾼 노릇을 한 사람들을 향해 용기 있게 외친 것이다.

오방 최흥종 목사의 생애와 사랑을 요약한다면 한 마디로 사랑의 사도였고, 정의의 선지자였다. 시편 85편 10절 말씀처럼 그는 정의와 사랑이 입맞춤하는 삶을 살았다.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도 과연 정의와 사랑이 입맞춤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한국교회는 이 시대의 반기독교적 정서와 공격, 비진리의 외침 앞에서 하나로 연합하여 정의와 진리를 얼마나 외치고 있는가? 그리고 이 시대의 소외계층과 취약계층을 향하여 사랑과 나눔, 공유의 삶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가? 이런 데는 전혀 관심도 없이 과거 조선기독교연합회처럼 그저 시류에 편승하고, 물량주의 속도주의 성공주의 세속주의라는 대세와 타협하는 것이 한국교회 지도자들 모습은 아닌가? 어쩌면 이런 모습들이 우리 시대에 벌어지는 제2의 신사참배는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성서조선>을 통한 최흥종 목사의 외침은 당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이며 최후 사랑의 통첩이었거니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애틋하고 애절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 최협 교수(전남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20)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는 힘없고 병들고 여리고 가난한 자들일 것이다. 오방 최흥종 목사님은 이런 ‘작은 자’들을 형제로 섬기며 그들과 더불어 사셨던 분이다. 그는 평생에 걸쳐 3·1운동에 앞장선 것을 비롯해, 노동운동 신간회운동 부녀자계몽운동 빈민운동 농촌부흥운동 그리고 한센병환자와 결핵환자 구제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최흥종 목사가 최초로 관심을 보인 섬김의 대상은 당시 사회문제로 크게 부각되기 시작한 한센인들이었다. 1908년 포사이트 선교사에 감화되어 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에서 한센병환자 치료에 뛰어든 오방은 1912년 민간인이 설립한 최초의 한센인 진료소를 광주 봉선동에 만들었다. 수용환자의 수가 크게 증가하자 1926년 여수 애양원 터를 확보하여 의료선교사들과 함께 새 치료요양시설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탰다.
1920년 삼일운동으로 인한 수감생활을 마치고 시작한 첫 활동은 광주YMCA 창립이었다. 또한 노동공제회 광주지회 설립에도 관여하고 창립회장이 되었다.

1921년 광주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후에는 당시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해 부녀야학과 유치원을 설립했다. 부녀야학에는 여성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한 박화성 김필례 등이 참여했으며, 이를 모태로 1923년 광주여성청년회가 결성된다. 그 후 서서평 선교사가 부녀야학을 이어받으며, 광주지역 여성지위 향상에 디딤돌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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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발표 ② / 오방 최흥종 목사의 삼애정신

“하나님, 이웃, 나라 사랑하라”

▲ 김효시 교수(광신대)

최흥종 목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으로 파악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이란 곧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해한 최 목사는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포기하고 이웃 특히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향한 봉사의 삶을 그 시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으로 인식했다.

1935년 아호를 ‘오방(五放)’으로 정하며 그는 지인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사망통고서를 보냈다. 오방이란 가사, 사회, 경제, 정치, 종교 등 5가지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곧 출세지향적인 모든 삶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추구한다는 다짐이었다. 이 정신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나라 사랑 등 삼애정신(三愛精神)으로 승화됐다.

먼저 하나님 사랑을 오방은 충(忠), 절(節), 의(義)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하나님 사랑은 그의 신앙활동 속에 투영되어있다. 그는 일제강점기 신사에 절할 수 없었다.

이웃(동포)에 대한 사랑을 오방은 경(敬) 존(尊) 혜(惠) 자(慈)로 표현하며, 이를 주로 한센병환자, 빈민과 걸인 그리고 결핵환자들을 향한 봉사로 나타냈다. 나라(땅) 사랑은 민족을 일깨우기 위해 젊은이와 여성 그리고 아동들을 교육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실천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또한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농촌을 부흥시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전남지역에 신용협동조합을 세우고, 농촌개발을 위해 광주YMCA 주관으로 농촌사업연구회도 설립했다.

그는 오늘도 역사의 길목에서 삶의 안내자로 우뚝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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