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훈 목사의 초량이야기]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반가운 인사와 수다를 주고받은 뒤에 친구는 대뜸 ‘다음 주간에 부산 내려갈 일이 있는데 만나서 밥 한 그릇 먹자’고 했다. 갑작스런 제안에 ‘좋아. 어디서 만날까?’라고 물었더니, 친구는 ‘부산하면 서면이지, 서면에서 만나자’고 대답했다.

그런데 ‘부산하면 서면이지’라는 친구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맞는 것은 지금의 서면이 부산의 중심가요 번화가라는 사실이다. 부산을 관통하는 중앙대로가 통과하며 은행, 백화점, 호텔, 심지어 성형외과를 중심으로 다양한 병원들이 개미집처럼 모여 있다. 게다가 먹고 즐길 수 있는 가게들이 자리를 잡고서 사람들을 서면으로 부르고 있다. 없는 게 없다. 친구의 말처럼 ‘부산하면 서면이지. 서면에서 보자’는 말이 맞다.

틀리다고 한 것은 원래 역사적으로 보면 ‘부산하면 동래와 초량’이란 사실 때문이다. 조선시대부터 부산의 행정과 통치의 중심은 ‘동래’였다. 그래서 그곳엔 아직도 관아와 산성과 역사의 흔적들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부산은 일본과 가까워서 무역과 행정 편의를 위한 ‘왜관(倭館)’을 두었는데, 거기가 바로 초량이었다. 지금도 초량에서 가까운 거리에 카페리 전용부두가 있어 대마도로, 후쿠오카로 배가 오간다. 동래는 통치행정과 군사의 중심이었고, 초량은 그 배후의 무역과 외교행정 지원의 거점이었다.

아주 오래전 하늘나라에 가신 A집사님이 생각난다. A집사님의 집은 서면을 지나고 동래를 한참이나 지난 동네에 있었다. 그 시절엔 교통편이 없었기에 거기서 초량교회까지 걸어서 예배하러 오셨다. 들과 밭을 지나 족히 두 세 시간을 걸어오면 나타나는 번화가가 초량이었다. 거기에 우리 초량교회가 있다.

초량의 한자는 ‘草梁’이다. 단어 그대로 하면 ‘풀밭의 길목’이라고 향토학자들이 푼다. 조선 성종 때 편찬한 지리책인 동국여지승람에는 초량항(草梁項)이라고 나와 있다. 길목이요 나루의 성격을 가진 지역이라는 뜻이다. 초량을 통하지 않고서는 부산 내륙으로의 육로 통행은 불가능하였고, 왜관을 중심으로 나름 국제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지 초량은 풀이 많은 동네였다. 어떤 이는 초량이라는 말이 ‘억새와 갈대’를 가리킨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자기가 어릴 때 할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라며 실제로 초량에 풀들이 많이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초량의 뒤쪽 배경이 되는 것이 구봉산이다. 구봉산에서 아래로 한참을 걸어 내려가면 부산역인데, 여기까지 대부분이 풀밭이었단다.

상상을 해본다. 구봉산에서 아래 비탈로 이어지는 푸른 풀들, 그리고 그 흔들림이 보기에 참 좋았겠구나. 거기에 아이들이 뛰어다녔겠고, 소들이 있었겠고, 온갖 작은 풀벌레들이 있었겠구나. 실제로 장로님 한 분이 현장 체험담을 하신 적이 있다. “여기가 어릴 때 우리 집이었는데, 이 옆이 바로 연못이었고 저기 조금 떨어진 곳이 풀밭이었고 소들이 있었습니다.”

▲ 풀밭의 길목이라던 초량은 옛말이다. 지금은 집들만 빼곡한 동네가 됐다.

진짜로 초량은 풀밭의 길목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것처럼 풀밭의 길목, 초량에 풀밭이 없다. 연못이 있었던 자리엔 인간들이 흙으로 매워서 세운 집들이 빼곡하다. 연못에 놀던 붕어와 우렁이들은 졸지에 매몰되었고, 슬픈 화석으로 그 땅 아래 묻혀 있다. 그 동네 사람들은 꿈 속에 붕어들의 억울한 울음소리가 들리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낮술 한 잔 걸치신 어르신이 소릴 지른다. 초량에 풀 대신 빼곡한 집들이 자리 잡은 것이 ‘빨갱이’ 때문이란다. 한국전쟁 때문에 초량에 피난민들을 비롯한 사람들이 밀려들어왔다. 생존이 절박했던 사람들은 풀밭의 길목에 있던 붕어를 몰아내고, 억새들을 몰아내고, 풀벌레들을 몰아내면서 살 집들을 지었던 것이다. 빨강(red) 때문에 초록(green)이 없어진 건가? 옳다. 하지만 빨강의 실체는 인간의 탐욕일 것이며, 풀들의 길목 그 아름다움이 뭔지를 모르는 인간의 무지함일 것이다. 오늘은 미세먼지 때문에 그런지, 삶의 무게 때문인지 초량 사람들의 얼굴이 진한 잿빛이다. 주님께서 이곳에 복 주셔서 진정한 푸른 풀밭의 길목인 초량이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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