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사적지 지정 앞둔 총회 신앙유산] ⑫ 김제 광활교회

간척지 평야서 시작된 복음의 행진… 전쟁 거쳐 철저한 애국신앙 바탕, 성장 일궈

 

▲ 교회 설립 7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역사사진전에 소개된 옛 사진들.

광활 사람들을 어떤 이들은 ‘개땅쇠’라고 불렀다.

전북 김제의 서해안에는 일제강점기였던 1925년 대규모 간척사업이 시작됐다. 전국에서 수많은 인부들이 찾아와 갯벌을 농지로 바꾸었다. 네모반듯하게 조성된 경작지와 마을들을 서로 구분하는 ‘답구’라는 표시가 도입됐고, 지평선이 관찰되는 커다란 평야가 형성됐다.

▲ 1954년 5월부터 기록되기 시작한 당회록의 표지와 순교사적이 담긴 교회 약사 기록 부분.

그렇게 변모한 땅들은 ‘개땅’으로 불렸고, 일꾼으로 이곳에 왔다가 정착한 사람들에게는 ‘개땅쇠’라는 별명이 붙여진 것이다. 하지만 개땅쇠들이 피땀 흘려 간척한 땅이 그들 소유가 될 리 만무했다. 대개가 소작인으로 전락했다. 몸이 부서져라 일해도 그 이익은 본인들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일본인들을 먹여 살리는 쌀 생산기지가 된 광활 땅은 착취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나라를 빼앗긴 것으로도 부족해, 사람들은 경제적 수탈이라는 또 다른 설움에 시달렸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은 그 역사를 생생하게 그려냈고, 광활 인근 죽산면에 조성된 아리랑문학마을을 찾아가면 당시의 안타까운 시대상을 가슴 치며 되새겨볼 수 있다.

복음은 그 암울했던 시절에 한 줄기 빛으로 다가왔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고, 새로운 세상을 향한 소망과 사랑의 위로가 그들의 막힌 숨통을 뚫어주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았다.

광활에서 걸어 한 시간 넘게 떨어진 진봉면 고사교회까지 다니던 성도들 몇 명을 김제에서 사역하던 이근호 목사가 만나 교회 설립을 권유한 것이 1948년 봄의 일이다. 그 중 한 사람이 최원귀 집사였다.

익산 황등면이 고향인 최 집사는 젊은 시절 부흥사 김익두 목사를 통해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된 후, 간척공사 한창일 무렵 식솔들을 이끌고 광활로 옮겨와 살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가 다니던 고사교회에서는 광활에 확장주일학교를 세우고 남녀노소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 당시 큰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거리를 행진하는 모습이 장관이었다고 전해진다.

마침내 그해 7월 최원귀 집사를 비롯해 최재순 최재희 등 3형제 가족들과 죽산에서 이사 온 정동 집사의 가족 등 15명이 첫 예배를 드렸다. 여름에 수확한 밀대로 만든 방석과, 둥근 멍석을 깐 토방에 오순도순 모여 앉아 찬송하고 기도하던 풍경이 광활교회의 시작이었다.

당시 마을에는 양곡창고를 개조한 농촌위생소 병원이 운영되고 있었는데, 병원 쪽과 협의를 거쳐 비어있던 건물 하나를 교회당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교회 첫 이름은 옥포교회로 정했다. 자신들의 마을에 교회가 생겼다는 기쁨으로 성도들은 늘 감사가 넘치는 예배를 드렸다. 1950년 4월에는 최원귀 집사의 장녀 결혼식이 처음으로 교회당에서 열리는 경사도 있었다.

▲ 수탈의 현장에 세워져 순교와 핍박의 질곡을 겪으며 자란 김제 광활교회가 설립 70주년을 맞이했다. 사진은 예배당 전경.

하지만 불과 두 달여 만에 잔치 분위기는 공포 분위기로 바뀌고 만다. 전쟁이 터진 것이다. 해방 직후부터 김제 일대에도 좌우이념 대립이 극심했고, 특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우익활동에 적극 가담했다. 당시 최원귀 집사는 광활면 독립촉성회 회장으로, 최재순 집사는 진봉대한청년단 간부로 각각 활동하던 중이었다.

자연히 인민군이 점령한 세상에서 광활교회 교인들은 반동세력으로 지목될 수밖에 없었다. 부산으로 피난한 최재순 집사 외에 남은 식구들에게는 엄청난 핍박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산은 몰수되었고, 체포된 최원귀 집사는 결국 그해 음력 8월 15일 김제 내무서에서 숨을 거뒀다.
최 집사 뿐 만이 아니었다. 광활교회를 함께 섬기던 안영덕 전도사와 공완석 청년, 고석봉 성도 등이 잇달아 목숨을 빼앗겼다. 교회 설립 2년여 만에 찾아온 너무도 엄청난 시련이고 비극이었다.

하지만 시련이 모든 것을 빼앗아가지는 못했다. 오히려 남은 성도들은 더욱 단단한 신앙으로 뭉치고 교회를 다시 일으켰다. 철저한 애국신앙 속에서 교회는 성장했다. 1958년 최재순 집사가 장로로 세워졌고, 이듬해에는 병원 건물 전체를 매입하여 교회당으로 확장했다. 태풍으로 해안 제방이 무너졌을 때는 교회당이 주민들의 피난처 역할도 했다.

이후 김용현 권윤도 문광진 문병원 최국조 박경상 목사에 이어 현 이재호 목사가 강단을 이어 지킨 70년 세월 동안 교회는 뒷걸음질 한 번 하지 않고 꾸준히 자라왔다. 많은 교회들이 내부 분란이나 교단 분열 등으로 혼란을 겪을 때도 광활교회는 늘 갈등 없이 잠잠하고 평안했다.
순교자 최원귀 집사의 집안에서는 최재순 장로가 4년 전 별세하기까지 원로장로로 광활교회를 끝까지 지킨 가운데, 장손 격인 최영 선교사가 헝가리 선교사로 파송되어 사역하는 등 수많은 목회자와 사회지도자들을 배출하는 은총을 누렸다.

▲ 광활교회 순교자들의 희생을 증언하는 광활초등학교 교정의 충혼불멸비.

순교사적 증언하는 충혼불멸비

앞서 총회로부터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 지정을 받은 이웃 만경교회와 달리 광활교회에는 이렇다 할 순교유산이 남아있지 않다. 교회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워낙 큰 격동기를 치르며 겪은 아픔이라 따로 보존하고 기념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사실상 순교사건의 공식적이며 유일한 유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교회당 옆 광활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충혼불멸탑이다. 충혼불멸탑은 일제강점기와 6·25 한국전쟁기간에 희생된 광활 출신 순국지사 8명과 전몰장병 35명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것이다. 8명의 순국지사 중에 바로 안영덕 최원귀 공완식 고석봉 등 광활교회 4명의 순교자들 이름이 포함되어있다.

1957년 ‘충혼불멸’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탑이 세워졌다가 흐르는 세월 속에서 점점 망가지자, 1990년 광복절에 문영석 면장과 면민들이 협력하여 새로 여섯 자 크기의 탑을 건립하고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김제시 교동 성산공원에도 광활교회 순교자들의 명단과 사적이 포함된 충혼탑과 반공희생자 위령비가 건립되어있다.

교회가 소장 중인 유물로는 1954년 5월부터 기록되기 시작한 당회록이 있다. 특히 당회록 첫 장을 장식하는 약사에는 교회설립에 관한 내용과 함께, 6·25 당시 순교사적에 대한 내용들이 포함되었다.

▲ 믿음의 선배들이 남긴 순교사적을 더욱 열심히 발굴하고 이어받겠다고 강조하는 광활교회 이재호 목사.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진 역사를 다시 찾는 작업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실들이 서서히 눈앞에 나타나면서 믿음의 선배들이 당당히 걸어간 순교의 발자취를 놀라워하며, 이제는 커다란 긍지로 여기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중입니다.”

5년 전 광활교회에 부임하면서 이재호 목사에게는 역사찾기가 중요한 과제가 됐다. 특히 설립 70주년을 앞두고는 순교자들의 사적을 복원하는 일에 많은 공을 들였다. 처음에는 교회 연혁과 당회록에 적힌 순교자들의 이름과 몇 줄의 기록이 전부였다.
“마을에 건립된 충혼불멸비의 내용들, 그리고 순교자 가문 출신의 최대진 장로(김제 신광교회)님의 구체적인 증언 등이 바탕이 되어 순교가 이루어지기까지 대체적인 전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관련된 역사를 더 발굴하고 자료를 확충해나갈 계획입니다.”

이 과정에서 이재호 목사는 교회에 대해, 그리고 오랜 시간 교회를 지켜온 가족들에 대한 깊은 자부심을 느끼게 됐다고 털어놓는다.

“농촌교회라는 한계와 불리한 조건 앞에서 막연히 핑계만 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전도사역에 매진했습니다. 장로님들을 비롯한 온 교우들이 혼신을 다해 동역해준 덕분에 지금도 꾸준히 그 열매를 맛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부임 당시 115명 수준이던 교세가 약 170명 수준이 되었다. 광활 일대가 벼농사 주력지역인데다, 새만금개발로 역 손해를 본 지역 중 하나인 것을 생각하면 이는 현상유지를 넘어 성장세를 기록했다는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이례적인 농촌교회 전도 성공사례로 손꼽힌다.

“올 봄부터 가을까지 교회 설립 70주년을 기념해 직원 임직식, 설립기념일 감사예배, 전도축제, 효사랑 큰 잔치, 역사사진전 등 굵직굵직한 행사들을 치러냈습니다. 이를 통해 더욱 이웃들에게 함께하는 교회, 섬기는 교회로 다가가겠다는 다짐을 나누었습니다.”

바쁜 한 해를 보낸 이재호 목사와 광활교회 교우들이 기다리는 선물 하나가 있다. 바로 김제노회를 통해 제103회 총회에 상정돼 총회역사위원회 심사를 기다리는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 지정 청원이 기쁜 소식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 선물은 광활교회를 더 깊은 사명감과 헌신으로 이끌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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