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복음으로 세상에 답하다 ② 영적전쟁은 세계관 전쟁이다

세계관 변화가 수반되지 않으면 기적은 또다른 우상숭배 조장 … 성경의 세계관에 서서 기권 없이 싸워야


지난 글에서는 왜 동성애가 무신론이 주도하는 영적전쟁의 도구인가를 설명하였다. 이번 글에서는 영적전쟁은 근본적으로 세계관의 전쟁이라는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왜 영적전쟁이 세계관의 전쟁인가? 각자의 믿음과 신념은 어떤 형태로든 삶의 현장에서 행동으로 표현된다. 자신의 믿음(혹은 신념)을 표현하는 행동의 배후에는 반드시 견고한 진을 형성하고 있는 특정한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은 근본적으로 세계관의 전쟁이 될 수밖에 없다.

개혁신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 중에, “삶이 종교이다(Life is religion)”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삶과 종교(믿음)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은 손톱만큼도 없다. 세상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이 곧 종교이다.

우리의 믿음을 삶으로 표현하는 모든 행동은 세계관이라는 종교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영적전쟁이 세계관의 전쟁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 14장 8~18절에 기록된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사건에서, 왜 영적전쟁이 세계관의 전쟁이 되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기적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한 사람을 만났다.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잘 듣고, 마음에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바울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직감하고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행 14:10)고 선포하였다. 바울이 선포함과 동시에 발을 쓰지 못하던 그 사람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였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루스드라에서 모든 사람들이 놀랄 만한 기적을 일으켰다. 이 기적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어났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이다.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지는 상황이다.

둘째, 기적을 목격한 루스드라 사람들의 행동
기적을 목격한 루스드라 사람들의 반응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생각하였다. 루스드라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존재는 신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인간의 상식과 기대와 한계를 넘어선 초자연적인 능력을 경험할 때, 그것을 초자연적인 신의 행위로 생각하는 것은 인류 보편적인 현상이다.

둘째는 바울과 바나바를 자기들이 믿고 있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자기들 눈앞에서 벌어진 사건을 자기들이 믿고 있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여 ‘신학화’ 작업을 하였다. 바나바는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자이므로, 자기들이 믿는 최고의 신인 제우스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울은 말을 하는 자이므로, 제우스의 뜻을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신인 헤르메스라고 생각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복음 전도자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이 섬기는 신인 제우스와 그의 메신저인 헤르메스가 사람의 형상으로 강림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바울과 바나바의 존재는 루스드라 사람들의 세계관이라는 렌즈를 통과하는 순간 전혀 다른 존재로 해석되고 이해되어 버렸다.

셋째는 루스드라 사람들은 자기들이 해석하고 정리한 신학화 작업에 상응하는 종교적 행위를 하였다.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급하게 소를 제물로 준비하고, 신당에 있는 화환들을 가지고 와서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 자기들이 해석한 신학에 따라서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을 한 것이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복음을 배척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복음을 확실하게 믿었고,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들이 믿고 있는 종교적 틀로 해석하고, 이론화하여 믿고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복음을 듣고, 루스드라 사람들이 이해하고 믿는 복음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자신의 생각에 따라 복음을 변질시키는 현상은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관이 바뀌지 않으면 자신이 보고 들은 복음을 자기의 필요와 욕구에 맞게 왜곡시키고 변질시켜서 받아들인다. 예를 들면, 물질의 풍요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추구하는 황금만능주의는 모든 종교의 신앙행위를 기복주의 신앙으로 변질시켜 버린다.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고 행동하게 하는 세계관의 변화가 중요하다.

셋째, 루스드라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바울과 바나바의 대응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복음이 충격으로 다가왔듯이, 바울과 바나바에게도 루스드라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 충격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을 신으로 여기고 제사하려는 루스드라 사람들의 행동을 도저히 두고 볼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에게 제사를 지내려는 루스드라 사람들의 행동을 중지시키고, 그들의 생각을 변화시켜야 할 절박한 과제를 부여 받았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에게 제사를 지내려는 루스드라 사람들의 행동을 절대해서는 안 될 어리석은 것이라고 강하게 설득하면서 만류한다. 루스드라 사람들을 설득하는 바울과 바나바의 논리를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바울과 바나바 자신도 신이 아니라 루스드라 사람들과 동일한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주장한다. 자기들은 제우스도 아니고 헤르메스도 아니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며, 자기들은 제사를 받을 이유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설득한다.

둘째는 나면서부터 걸어보지도 못한 사람을 일으킨 것은 바울과 바나바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설명한다. 걸어보지도 못한 사람을 걷게 만드는 능력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지금 루스드라 사람들이 하고 있는 거짓 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에서 창조자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나간 세대에는 자연현상을 통한 일반 계시로 자신을 모든 족속에게 증거하셨지만, 이제 때가 차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특별 계시로 자신을 이방인들에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설득하며 설명한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복음을 온전히 믿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들이 지금까지 믿고 살아왔던 모든 종교적인 신념과 습관을 총체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바울 사도가 전한 십자가의 복음이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총체적인 세계관의 변화를 요구하는 도전으로 선포된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의 간절하고 강력한 설득은 자기들에게 제사를 지내려던 루스드라 사람들의 행동을 간신히 중단시켰다. 이렇게 되기까지 바울과 바나바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쳤다. 가만히 앉아서 말로 설득해서 얻은 결과가 아니다. 말로 설득하고, 행동으로 보여주고,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그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만류하였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를 지르면서 그들의 행동을 저지하였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보기에는 제우스가 자기들 가운데로 뛰어 들어와서 옷을 찢고, 소리를 지르면서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생각하고 제사를 지내려는 행동을 겨우 막았다.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과 세계관을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과정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것은 인간의 논리와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노력이 없이 저절로 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바울과 바나바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무리 가운데로 뛰어 들어가서 소리치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 옷을 찢는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그런 노력 위에 성령이 역사하여야 가능한 것이 세계관의 변화이다. 이런 면에서 세계관의 전쟁은 성령과 함께하는 영적전쟁이며, 궁극적으로 성령의 능력에 호소하는 전쟁이다.

결론적으로, 믿음은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세계관의 전쟁이다. 기적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사건에서 보듯이 세계관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기적은 또 다른 우상숭배를 조장할 뿐이다. 진정한 복음화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서 그들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화는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삶의 전쟁이요, 세계관의 전쟁이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든 세계관의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성경의 세계관에 서서 싸우든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무신론의 세계관에서 싸우든지 반드시 선택을 해야 한다. 세계관의 전쟁터에서 중립은 없다. 기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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