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전환기의 50플러스 세대와 교회의 사역 ②

▲ 오창섭 교수
(서라벌대)

‘청년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는 말은 많이 들었다. 중장년이 살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교회에서 중장년은 축구로 말하면 미드필더와 같다. 미드필더는 ‘믿을 맨’이 되어 링크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공수의 조율과 슈팅 공간 창출을 위해 부지런히 뛰어 다닌다. 그런데 교회의 미드필더들은 지금 식어가고 있다. 설렁설렁 자리만 지키거나, 지친 기색이 만연하다.

왜 그럴까? 이유는 2가지, 먹고 사는 문제와 살아갈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생존’과 ‘의미’이다.

교회의 중장년 성도들은 먹고 사는 문제로 지쳐 있다. 이탈하는 경우까지 발생하고 있다. 경제는 어렵고 살기는 팍팍하다. 열심히 뛰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여력이 안 된다. 교회공동체에서도 열심히 살아갈 의미를 좀처럼 발견할 수 없다. 나이를 더해갈수록 삶의 의미와 목적이 필요하건만, 이게 채워지지 않는다. 그저 몸만 출석할 뿐이다. 이 나이에 다른 교회로 옮기기도 마땅치 않다.

이런 상황이 심화하면 교회에서 대다수 중장년들은 어정쩡한 형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여름날 몸보신하러 모이는 전도회원의 모습으로. 혹은 기득권과 꼰대 이미지에 덧씌워 버린다. 잘 삐치고 담임목사와 대치하며 잔소리도 많다. 누구도 상대하려 하지 않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오늘날 교회 내 50플러스 세대의 형편과 처지가 이러하다. 그러나 명심해야 한다. 중장년은 ‘손 안에 잡힌 새’가 아니다. 교회공동체가 ‘그 나이에 다른 교회 가봐야 할 것도 없고, 그러니 어쩌겠나’라고 체념하는 이 지점이 함정이다. 50플러스 세대들도 아파하고, 답답해하고, 갈등한다. 어느 날 갑자기 경제력은 반토막 나고,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가 밀려왔다. 그들에게도 인생이, 가족이, 꿈이 있다. 하지만 은퇴를 앞두고 “이 나이 먹도록 할 줄 아는 게 뭔가?”하며 무력감과 서글픔에 잠겨 있다.

지금이야말로 50플러스 세대들과 제대로 소통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들은 웬만한 고민이 있어도 함부로 드러내지도, 입을 열지도 않는다.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무관심한다면, 중장년이 교회를 떠날 수도 있다. 지금까지 교회공동체는 그들의 고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소통하지 않았다. 은퇴와 경제위기, 자녀 교육과 결혼, 건강의 적신호, 사회적 관계망과 대인관계, 취미와 여가 그리고 미지근한 신앙에 이르기까지.

50플러스 세대들은 하루에도 수 십 번씩 팍팍한 현실의 나락에서 거칠게 숨을 쉬고 있지만, 교회의 대응은 미온적이었다. 이제 이들을 회복시키고 새로운 일꾼으로 무장시켜야 한다. 이들을 새롭게 바라보고, 가족처럼 애정을 쏟아 붓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오늘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인생의 전환기에 선 50플러스 세대들에게 교회공동체의 지지와 관심과 케어가 필요하다.

교회의 주축인 50플러스세대는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다고 내버려둬야 할 대상이 아니다. 힘들 때 손을 내밀고 도움을 요청하도록 해야 하고, 아픔을 헤아려 손을 잡아주는 사역의 동반자로서 함께해야 한다. 50플러스 세대에게 관심과 지지를 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장 손쉬운 전화나 문자로 안부를 묻고 응원을 보내는 것만으로 효과를 볼 수 있다. 보다 전문적인 사역을 원한다면, 상담이나 진로 문제 전문 사역자를 세우면 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수 14:12)라고 외친 갈렙처럼, 마침내 잠에서 깨어나 대지를 포효하는 50플러스 세대의 사자후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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