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도르트신경 400주년 ⑪ 도르트신조와 칼빈주의 - 성도의 견인을 중심으로

성도의 견인은 인간 나태함의 원인이 아닌 하나님 구원과 그 확실성을 보장하고 있는 칼빈주의 핵심교리

1. 들어가는 말

▲ 김상현 목사
(목장교회)

현재 전 세계의 개혁교회의 교리 규범은 모두 도르트 신경에 기인하고 있다. 소위 "반대자들에 대항하는 다섯 조항"이라고 불리는 이 도르트 신조는 1618년-1619년에 걸친 도르트레히트의 개혁 종교회의(the Reformed Synod of Dordrecht)에서 채택된 것이다. 그래서 칼빈주의 교의학자 헤르만 바빙크는 도르트 신조를 개혁주의 신학과 모든 신조들의 정점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이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구원의 방편 성도의 견인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이 신조 안에 그대로 녹아있기 때문이다. 이 도르트 신조의 탄생으로 인하여 5세기 펠라기우스 논쟁으로부터 17세기 알미니우스 논쟁까지의 모든 비성경적인 논쟁들이 종결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개혁주의 교회는 이 도르트 신조에 무한한 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도르트 신조는 벨기에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칼빈주의 신학의 완성형이라 할 수 있다. 이 도르트 신조는 예정론을 중심으로 하는 칼빈주의 신학에 반대하는 알미니우스를 중심으로 한 항론파에 대항하여 세워진 것으로 도르트 종교회의에서 결정된 신조이다. 이 도르트 회의의 구성원들을 보면, 네덜란드의 개혁교회의 대표자들뿐만 아니라 국외의 27명의 대표자들이 함께 모였다. 이 도르트 회의는 정통주의 신학과 신앙을 수호하는 장이 되었으며 그동안 어거스틴에 대항하는 펠라기우스파의 영향을 받은 비정통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서구의 정통주의 시대를 여는 장이 되었다.

이 도르트 회의에서 채택된 것이 알미니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반 개혁주의 신앙에 대한 답변으로 그 유명한 칼빈주의 5대 교리라고 말한다. 이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개혁주의 교회들이 채택하고 있는 칼빈주의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도르트 회의 500주년을 맞이하여 도르트 신조의 배경과 그리고 도르트 신조에 녹아있는 칼빈주의 교리에 대하여 고찰해보도록 한다.

2. 도르트 회의의 배경

2.1. 도르트 신조의 역사적 배경

1560년대 이후 칼뱅의 사상은 유럽의 전역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루터파가 스칸디나비아와 프러시아 및 독일 북부 지역으로 번져 독점적인 종교가 된 반면에 칼뱅의 사상은 온 유럽에 널리 알려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칼뱅의 재임 시 칼뱅은 조국 프랑스의 종교개혁을 위해 수많은 훈련받은 목회자를 파송하였으며, 영국의 종교개혁에도 관여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저지대에도 칼뱅의 사상이 전파되었다. 칼뱅의 사상이 네덜란드에 전파된 계기는 그가 스트라스부르크에 있었을 때, 네덜란드 사람인 요한네스 스투름(Johannes Strum)을 잘알 게 되었다. 또한 과거 그가 제네바에 있을 때 여러 네덜란드의 개혁파 지도자들을 알고 있었다. 그 결과 칼뱅은 칼빈주의의 첫 번째 설교자를 네덜란드에 파송하기도 하였다. 1544년 후반기 칼뱅은 피에르 브를리(Pierre Brully)에게 토우나이와 발렌신네스(Valenciennes)로 가서 설교하도록 권유하였다. 불어를 사용하는 많은 화란인들이 칼빈주의를 배우게 되거나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동 프리슬란드(East Friesland)의 엠덴으로부터 존 아 라스코(John A Lasco)의 가르침이 화란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칼뱅이 그의 1545년 라틴어 교리문답을 헌정한 것은 ‘동 프리슬란드에 있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들이었다. 1550년 런던에서 라스코가 세운 교회에는 상업에 종사하는 화란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화란 항구도시들과 계속 거래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개혁교회의 문헌들이 국경선 전반에 걸쳐 육지와 바다로 상업에 숙달된 나라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네덜란드에 들어간 개신교 교회는 우선 루터파가 들어가고 곧바로 뒤이어 개혁교회가 그 바통을 물려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개혁교회의 물결이 네덜란드로 들어가자 네덜란드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네덜란드의 종교개혁은 네덜란드의 종교개혁과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즉 다른 나라와는 달리 가톨릭 세력과 대항하여 싸운 종교전쟁이 곧 외세의 통치로부터의 해방과 독립을 위한 전쟁이었다는 점이다. 16세기 당시 오늘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이 위치하고 있는 라인강 하류의 낮은 일대의 17개 provinces는 합스부르크 지배하에 있었다.

1520년부터 루터의 종교개혁의 소식과 함께 그의 사상이 루터파의 설교자들을 통해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인 호응을 보였다.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은 어거스틴 교단의 부 수도원장 주트펜(zutphen)의 하인리히가 루터의 글들을 소개하고 보급함으로써 여러 도시로 확산되었다. 그 책들은 불어를 사용하는 지방에 가장 널리 침투되었다. 하지만 1523년 브뤼셀에서는 루터의 사상을 전파하던 어거스틴 교단 두 수도사가 화형을 당하였다.

1525년부터는 성찬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화란의 인문주의자 코넬리우스 호엔(Cornelius Hoen)은 쯔빙글리와 마찬가지로 성찬 제정의 말씀에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하여 가톨릭의 화체설을 비판하였다. 1530년 경부터는 재세례파들이 들어와 뮌스터 성을 점령하는 등 소요가 있었으나, 그 이후에는 칼뱅의 사상이 전해져 본격적인 개혁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에 1550년 당시 네덜란드를 통치하던 합스부르크가의 카알 5세는 개신교의 확장을 저지하려고 가혹한 탄압 정책을 스면서 ‘루터, 오이코람파디우스, 쯔빙글리, 부처, 칼뱅 혹은 거룩한 교회가 이단으로 낙인찍은 자들의 책이나 글’을 인쇄하거나 소유한 자들은 화형에 처한다고 칙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1561년 10만 명의 개신교도들이 화형을 당하거나 참수를 당했으며, 산 채로 매장을 당하였다. 그런데 이때만 해도 새로운 신앙을 가진 개신교도들은 소수였고 대부분이 가톨릭이었으므로 카알 5세의 조치에 큰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카알 5세가 부왕에게서 물려받은 이 지역의 통치권을 1555년 자신의 아들 필립 2세(Philip Ⅱ)에게 넘겨 준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필립 2세는 카알 5세와 스페인 여왕 이사벨라 사이에서 태어나 스페인에서 자랐으며 스페인어를 사용하므로, 주민들은 그를 외국의 군주로 간주하였다. 그 뿐 아니라 1556년 필립이 부왕에게서 스페인의 왕위를 물려받은 후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등 스페인 위주의 정책을 쓴 탓에, 주민들은 그의 학정에 불만을 품고 독립을 기도하였다.

1565년 4월 주민들은 브뤼셀 당국에 종교정책을 완화시켜 줄 것을 청원하였으나 거부되었다. 이 때 관리들은 청원자들을 경멸하여 ‘거지들’이라고 칭하였다. 저항과 탄압이 반복되자 ‘거지들’은 조직적인 저항을 꾀하였다. 1566년 회중들은 때때로 들에 모여 경비병의 호위를 받으며 예배를 드렸다. 설교자들이 턱없이 부족하기도 하였다. 이 때 네덜란드의 독립군을 이끈 영도자는 칼빈주의자로 개종한 윌리엄 오렌지 공(William of Orange)이다. 네덜란드의 독립군은 육상에서는 스페인군에 번번히 패하여 무자비하게 주민들이 학살되기도 하였지만, ‘바다의 거지들’이 해상권을 장악하여 해안지대를 점령하고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스페인에게 치명타를 입히곤 하였다.

당시 개신교인의 수는 월등히 적었으나 윌리엄 오렌지 공의 노력으로 다수의 가톨릭 신자들이 반 스페인 전선에 참여하여 연합을 이루었다. 그 결과 1587년까지만 해도 가톨릭이 절대 다수인 남쪽 벨기에는 가톨릭 국으로 남아있었고 북쪽 네덜란드는 칼빈주의 나라로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 이제 명실공히 네덜란드는 개신교 특히 칼빈주의 국가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한편 1560년대 후반에서 1570년대 초반에 네덜란드의 개혁교회 사이에서는 더 큰 조직과 교리적 권징을 위한 중요한 운동이 등장하였다. 네덜란드의 칼빈주의자들이 1568년 베셀(Wessel)에서 모였고, 1571년 엠덴(Emden)에서 모였다. 이 교회회의는 공식적으로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교회 질서에 기틀을 마련하였다. 엠덴 교회회의에서는 1559년에 작성되고 1561년에 구이도 데 브레가 배포하기 위해 개정되었던 벨기에 신앙고백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도 네덜란드의 개혁교회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는 독일의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하이델베르크의 젊은 신학교수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와 ‘하일리게 가이스트’ 교회의 목사 올레비아누스(Caspar ollevianus)로 하여금 새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게 함으로써 탄생하였다.

2.2. 도르트 신조의 사상적 배경

도르트 신조의 사상적 배경은 벨기에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프랑스 신앙고백과 거의 일치하며 교회의 중요성, 권징, 명백한 신앙고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은 죄와 은혜와 감사에 대한 칼빈주의 신학이 그대로 녹아있다고 할 수 있다. 이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는 상당히 훌륭한 신앙고백서요 개혁주의 신앙고백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으나 예정론에 대한 부분이 결여된 약점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618년부터 19년까지 화란의 도르트레히트에서 도르트 회의가 개최되었다.

당시 화란은 정치적으로 거의 일치가 되어가고 있는 시점이었으나 신학적으로는 대립을 면치 못하였다. 이 신학적인 대립은 알미니우스의 논쟁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논쟁으로 인하여 연합 주들이 내란직전까지 이르렀다. 알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는 제네바에서 공부하였고 베자가 준 추천서를 가지고 암스테르담에서 목회자로 시무한 바 있고 이후 라이덴(Leyden) 대학의 프란시스 유니우스((Francis Junius)의 후계자로 일하였다.

알미니우스는 처음에는 철저한 칼빈주의자였으나 점차 그 생각을 달리하였다. 당시 알미니우스는 예정론을 부인하는 드릭크 쿠른헤르트의 이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쿠른헤르트의 주장이 옳다는 결론에 달하였고, 1604년 “예정에 대한 논제들”(Theses concerning Predestination)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예정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작정으로서,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 안에서 영원 전부터 자신이 믿음을 부여하시기로 작정하신 신자들을 의롭게 하시고, 양자로 삼으시며 영생을 주셔서 자신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양하시도록 모든 영원 전부터 결정하신 작정”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예정은 예지에 기초해 있다고 말하였다. 알미니우스는 “이 예지에 의해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원 전부터 그의 선행하는 은혜(prevenient grace)에 의해 믿게 될 사람이 누구인지를 아셨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논제야말로 이전의 벨기에 신앙고백과도 내용이 일치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마루스를 비롯한 수많은 칼빈주의자들은 알미니우스의 예정론이야말로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이미 선택하신 자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들을 구원하신다고 정의하는 벨기에 신앙고백의 예정론과는 분명 다르다고 반박하였다. 사실 알미니우스와 고마루스는 예정의 근거에 대한 부분에서만 불일치했다. 두 사람 다 예정(predestination)의 존재 자체는 인정했다. 알미니우스는 교회론, 성례론 등은 칼빈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했다. 그러나 고마루스가 '신앙' 자체를 예정의 결과라고 주장한 반면, 알미니우스는 예정이 하나님의 예지(豫知)에 근거하며, 예정이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중보자이며 구세주로 결정한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1605년 지역교회에서 알미니우스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려고 하였지만 대학은 이를 거부하였다. 같은 해에 전체 주 교회회의가 그 문제를 조사하기 위하여 전국 교회회의를 요청하였으나 정부는 반대하였다. 이에 올덴바르너벨트가 대신 1608년과 09년에 비 교회회의를 소집하였다. 엄격한 칼빈주의자들은 알미니우스가 칭의와 선택에 관한 문제에서 정통 칼빈주의 노선에서 심각할 정도로 이탈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논쟁은 1609년 알미니우스가 사망함으로써 잠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의 제자 요한 위텐보가르트(John Uytenbogert)가 이끄는 46명의 알미니우스 파 목사들은 1610년에 회합을 갖고 탄원서 즉 항변서(remonstrance)를 작성했고 자신들의 지위를 보장해줄 것을 네덜란드 정부에 요구했다. 그들은 이 문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영원한 생명으로 선택하시되 사람이 세상에서 행하는 선한 행위를 조건으로 선택하신다고 하며, 은혜는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고 상실될 수도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만인을 위해 죽으셨다고 하였다. 또한 믿음의 선물을 거부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이에 1611년 보수적인 칼빈주의자들은 반 항변서(Contrarenconstrance) 문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정치적인 문제로 한때 정부를 비롯한 많은 귀족들이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편을 들었지만 정치적 문제에서 승리를 거둔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예정론으로 인한 논쟁을 종결짓기 위해 1618. 11-1619. 05까지 도르트에서 154번의 도르트 회의(Synod von Dortrecht)가 열렸다.

이 도르트 회의에 자국 인사들로는 네덜란드 주(州)의회들로부터 파송된 정치인 20명, 각 지역노회로부터 파송된 목사 30명과 장로 17명 그리고 네덜란드 다섯 대학교의 교수들 5명이 참석했다. 개회일 때 항론파 인사들은 우트레흐트로부터 겨우 3명만 왔고, 외국 인사들로는 위그노들의 내부사정으로 인해 불참한 프랑스를 제외한 8개 지역 27명이 참석하였다. 이렇게 볼 때, 도르트 총회는 네덜란드 개혁주의 교회를 넘어선 유럽 개혁주의 교회연합의 국제적인 종교회의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도르트 총회를 통해서 펠라기우스적인 구원론을 주장한 알미니우스주의(항론파의 입장)는 정죄되었으며, 개혁정통신앙이 승리와 성경진리의 분명한 표현으로 유럽의 개혁교회에서 환영을 받았다.

도르트 회의의 결정들은 일련의 법규로 명문화되어 ‘항의서’의 5개 조항에 신랄한 어조로 응답했다. 예정을 정의하되 모든 신인협동, 곧 구원사역에 인간이 참여하는 모든 요소를 배제하였다. “이 선택은 예지된 신앙이라든가, 신앙의 순종이나 성결 또는 기타 인간 안에 있는 어떤 선한 특성과 성향을 선택의 필요조건 내지는 원인으로 근거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선하신 기쁘심만이 이 은혜로운 선택의 유일한 원인이다.” 이와 같은 단언은 단호히 알미니우스 파의 견해(하나님의 모든 인간을 향애 부르시는 부름은 각 개인의 긍정적 반응이 아니면 부정적 반응에 달렸다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그런데 알미니우스파의 견해에 반대한 개혁파 정통교회의 결정들은 칼빈주의 사상을 그대로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때 이 도르트 신조들은 알미니우스주의자들에 의해 엄격하고 무미건조한 개혁 스콜라주의 신학의 표현으로 과장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도르트 신조는 성격상 매우 목회적이고 교회교육을 위해 사려 깊게 작성되었다. 그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조건의 비극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은혜롭고 효과적인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준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도르트 신조에는 믿는 자의 위로에 관한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도르트 신조에는 믿는 자의 위로에 관한 주제가 계속 반복되고 있다. 이는 칼뱅의 사상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주의 5대 교리로 대표될 수 있는 이 도르트 신조에 나타난 칼뱅의 사상의 특징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대표될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자, 유지자, 통치자, 구속자로서 당신의 모든 피조물과 그들의 모든 행위에 대해 주권을 행사하신다. 이 교리가 그의 다른 모든 교리의 기초와 토대를 이루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으로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거부할 수 없는 은혜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신다. 또한 칼뱅은 자신의 신학에서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부패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도무지 선을 행할 능력도 없다. 이러한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경배하여야 한다.

3. 도르트 신조에 나타난 칼빈주의 교리

알미니우스 사후 일 년 후 알미니우스 추종자들은 알미니우스의 견해에 근거한 5개 조항을 작성하여 네덜란드 정부에 진정서의 형식으로 제출하였다.

이 5개 조항은 제1조. 하나님은 세계가 생기기 전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며 불변한 한 목적을 가지시고 타락한 죄인들 가운데서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예수를 믿고 이 신앙과 신앙의 순종 안에서 이 은혜를 통하여 마지막까지 견딜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또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신다.

제2조. 여기에 일치되게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셔서 십자가 위의 자기의 죽음으로써 모든 사람을 위하여 구원과 죄의 용서를 성취하셨다. 이 말의 의미는 비록 믿는 자들이 구원을 받을지라도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제3조. 사람은 자기 스스로 또 자기 힘으로는 참으로 선한 일을 생각하거나 행할 수 없을 정도로 반역과 죄의 상태에 처하여 자기 힘으로 구원하는 은혜도 갖지 못했고 또한 자기의 자유의의 힘도 갖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나며...

제4조 그러나 그 은혜가 작용하는 양식에 있어서는 그 은혜를 사람이 거절할 수 있는 것이니, 성령을 거역하는 많은 사람에 관한 기록은 사도행전 7장과 다른 많은 곳에서 나타난다.

제5조 참된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그의 생명을 주시는 영을 받는 사람은 사탄과 죄와 세상과 또 자기 자신들의 육에 대항하여 싸워서 승리를 얻는 충분한 힘을 가진다. 그러나 그들의 태만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들의 생활의 처음 시작을 다시 저버리거나, 이 악한 세상으로 되돌아가거나... 은혜를 무효로 돌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가부 문제는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설득하여 우리 자신이 그것을 가르칠 수 있기 전에 성서적으로 독특하게 결정하여야 할 것이다.

이 5개조에 대한 반박의 형식으로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그리고 유기, 하나님의 은혜, 성도의 견인에 대하여 5개조 형식으로 답변하였다. 이 신조의 내용은 4개의 조항아래 93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는데, 59개항은 반항변파의 입장을 기술한 것이고, 34개항은 항변파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었다.

3.1.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제1교리는 모두 18조인데 주로 하나님의 거룩한 예정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인간의 부패로부터 신조를 시작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범죄하여 저주 아래 있고 영원한 죽음을 받아 마땅하므로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죄와 저주 아래 남겨 두시고 그 죄로 말미암아 정죄하시기로 작정하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불의를 행하시는 것이 아니다. --- 중략

하나님께서 시간 안에 어떤 이들에게는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어떤 이들에게는 주시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나온다. 그 작정을 따라,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의 마음이 아무리 완고해도 은혜로 부드럽게 하시며 믿음으로 기울게 하신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가 아닌 사람들을 그분의 심판으로 그들 자신의 악함과 완고함 사이에 남겨 두신다.”

위에서 나타난 대로 하나님께서는 작정 또는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 작정에 따라 일어날 모든 것들을 미리 정하셨다.(행 15: 18절, “영원부터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행하시는 모든 일을 아시며”, 엡 1: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사람이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미리 계획하고 그 계획에 따라 일을 진행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미리 계획하시고 그 계획에 따라 일을 진행하신다.

하나님의 예정은 선택과 유기로 신적 선택은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을 구원하시기로 택하셨다는 뜻이며, 유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정의를 주권적으로 이행하시는데 어떤 이들을 지나치신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결과는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에서 온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 이전에 자기 자신의 주권적인 선한 뜻에 따라 단순한 은혜로 어느 수의 사람들을 선택하셨는데, 인간의 조건(미리 내다보신 믿음, 순종 등)에 따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의지, 즉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하신 것이다. 선택의 교리는 신구약 성경에 명시되어 있으며, 유기자들을 심판에 처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선택과 유기에 대하여 인간은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지 않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선택의 교리에 많은 구별들을 만들어냈다. 사람 안에서 하나님께서 고려하실 만한 것들을 미리 아시고 선택하셨다는 것인데,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두 가지 아니 세 가지 선택을 주장하였다. 첫 번째 선택은 복음을 믿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작정이다. 이 선택은 죄인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단지 확정적이지 않은 일반적인 명제이다. 그리고 알미니우스파들은 더 구별을 해서 하나님께서 누가 믿을지 미리 아셨기 때문에 그 믿을 사람들 수를 일정 수를 택하신 두 번째 선택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신자들은 여전히 배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작정은 세 번째 선택을 포함하게 되는데, 이 선택에 따르면 믿음 안에서 인내하는 사람만이 최종적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선택론이 참이라면 모든 것은 당연히 사람에게 의존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믿을지 결정하는 것도 사람이고 복음을 영접해야 하는 것도 사람이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는 불필요한 것들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들이 없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도저히 선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지어 믿으려는 마음도 먹을 수가 없으며 회개할 마음도 먹을 수가 없고 따라서 은혜 없이는 결코 믿음에 이를 수가 없다. 또한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서도 인간이 반박할 수 없는 이유는 로마서 9:20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하였으므로 인간이 이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할 수 없다.

Calvin은 이 예정론의 교리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한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선택만 하시고 부름에 응답하고 선행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를 무색케 할 수 있다. 그러나 선택이 단순히 선택에만 머무르지 않고 구원의 서정에 까지 유기적 관계로서 우리에게 설명되어진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믿음으로, 내가 선을 행함으로' 구원받게 되었다는 교만함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3.2.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이를 통한 인간의 구속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이를 통한 인간의 구속은 총 9절로 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 알미니우스주의자들과 칼빈주의자들은 오직 믿는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데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논쟁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효과이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즉, 보편속죄를 믿었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에서와 유다 그리고 자신들의 죄 가운데서 멸망한 다른 모든 유기지들을 위해서도 죽었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그분의 백성을 위해서만 죽으셨다고 즉, 제한속죄를 주장하였다. 여기서 제한되었다는 의미는 그 가치나 능력에서 제한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계획과 성취에서 제한되었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10:15절과 27절을 보면,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나는 저희를 알며"라고 하였다. 이 말은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었으나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는 제한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양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의미이다. 위 본문에서 “위하여”라는 말의 의미는 “대신하여”라는 의미이다. 이 말의 참된 본질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대리인으로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그리스도께서 그 속죄에 포함된 사람들을 위해 고난 받으셨고, 속죄에 포함된 사람들은 모든 율법의 형벌에서 영광스럽게 건지심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단지 구원을 가능케 한 것이 아니라 그 속죄가 이루어진 사람들을 실제적으로 구원하였던 것이다.

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자비로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의 보증으로 주셔서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시고,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은바 되게 하사,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하였다. 여기서 보증이란 책임을 진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보증이나 대리인으로서의 사역이다. 죄 값을 갚는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대리인이 되셨다는 말이다.

도르트 회의 때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며 “위하여”라는 의미가 “모든 인류의 유익을 위하여”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는 일반은총적인 답변이다. 사도 바울도 이 말을 사용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했을 때 바울은 모든 인류에 대한 혜택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도르트 신조의 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어느 정도 죄인들에게 유익을 줄 뿐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죄인들을 구원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도르트회의 때,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칼빈주의자들이 복음을 모든 이에게 설교하지 않는다고 비방하였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당신들의 제한 속죄교리와 선택교리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당신들은 택함을 받은 자들을 향해서만 설교하도록 제한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도르트 회의 때의 칼빈주의 선조들이나 현재의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의 가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지 상관없이, 모든 이에게 복음을 설교해야 함을 명백히 가르친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 15) 하셨기 때문이다.

복음은 모든 죄인에게 선포된다. 단순하게 그냥 “죄인들”을 향해서이다. 그러나 오직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구원에 대하여 갈망하는 사람들만이 주님 앞에 나오고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이 성경의 진리이다.

3.3. 인간의 부패와 하나님께로 회심과 그 회심이 일어나는 방식

이 장의 교리는 세 번째와 네 번째 교리가 포함되어 있다. 이 교리는 총 17개 절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에 초점이 맞추어 있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제출한 항론서에서 인간의 타락의 범주와 은혜의 필요성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중생하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실상은 죄 가운데서 죽은 것이 아니요, 영적인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는 것도 아니요,”라고 하였다. 이는 인간의 부분적인 타락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오류논박 2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함, 거룩함, 의로움과 같은 영적 은사들과 선한자질들과 덕성들은 사람이 처음 지음 받았을 때 사람의 의지에 속했던 것일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이 타락으로 사람에게서 분리되었을 수 없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말하기를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의 모양으로 창조되지 않았다고 부인한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항상 이 형상과 모양을 동의어로 보았다. 그러나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모양이 거룩함, 완전함, 의로움과 관련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사람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며 그 자신의 노력과 순종의 대가로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타락 이전의 사람은 칼빈주의자들이 사람이 가졌다고 주장한 것들을 다 가진 성숙한 피조물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사람은 무흠한 아이 같으며 성숙할 가능성이 있는 그런 존재라고 말한다. 사람은 지식을 증가시키고 거룩함과 의를 얻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지 이런 것들을 창조 시에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더 나아가 그들은 아담은 의로운 상태로 지음 받은 인간이 아니며 오히려 무흠한 상태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담은 선과 악의 중간 상태에 있었고 중립상태에 있었다고 말하였다.

이는 심각한 오류로서 이 견해가 옳다면 타락은 전혀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거룩함이 원래 형상의 일부분이 아니라면 타락으로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타락한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지 않았으며 이성과 의지가 여전히 온전하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르트 신조는 에베소서 4장과 골로새서 3장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사람은 타락으로 잃어버린 형상을 다시 부여받는 다고 하였다. 이 형상은 지식과 의와 거룩이며 이것들은 성령의 중생하게 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다시 회복된다고 하였다.

아담은 참된 의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자신의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였고, 아담은 선으로 기울어져 있어 계명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이 뒤틀리고 말았다. 신조는 성경에 근거해 그 타락이 하나님께 대항한 반역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타락의 결과로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주셨던 것과 정반대의 존재가 되었다. 성품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보다는 부분적인 타락을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이 거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대로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인정할 때,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에 불가항력적으로 사람은 응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칼뱅은 부르심이란 말씀의 들음에만 의존하지 않고 거기에 성령의 조명이 있음으로서만 성립될 수 있다고 하였다. 분명히 인간은 자신의 충동에 떠밀려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은 없으며 성령의 은혜로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칼뱅은 그의 요한복음 6:46의 주석에서, 택자와 비택자에게 똑같이 베풀어지는 외적인 부르심은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데려오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복음의 말씀이 일반적으로 널리 전해지고 있으나 죄인 자신의 무능력에서 오는 무지 때문에 복음 앞에선 인간은 본래부터 눈먼 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래부터 눈먼 자들은 성령께서 깨우쳐 주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3.4. 성도의 견인

도르트 신조에 나타나 있는 다섯 가지 교리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성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신 사람들을 시간 안에서 성자 하나님께서 구속하시고, 그 구속을 성령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마음에 적용하실 때, 택함 받은 자들은 새로워지며 틀림없이 구원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구원받는 참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안전하다.

도르트 총회 때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성도의 견인(인내)은 신자 자신의 선한 행동이나 의지에 달려 있다고 말하였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확실히 은혜가 필요하지만 사람이 인내할 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개혁주의자들은 도르트 총회 이전 즉,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에도 성도의 견인에 대하여 말하였고 도르트 총회 때 이를 다시 확인한 것이다.

견인하는 사람은 오직 성도들뿐이다. 여기서 성도란 참되게 거듭난 사람들, 성령님께서 중생하게 하신 사람들이다. 신앙을 고백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탈락한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요일 2:19)라고 요한은 말하였다. 도르트 총회 때 칼빈주의자들은 죄의 권세와 지배에서 건짐 받은 사람이 성도라고 가르쳤다.

참된 신자들은 방황하고 여러 번 범죄하고 의심과 두려움으로 고통 받을 수 있지만, 오직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주의 길을 걷는다. 신자는 마지막 날에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될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왕이시며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신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비록 이 구속이 놀라운 것이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다.

1항, “하나님께서 그분의 계획을 따라, 그분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통 안에서 부르시고, 성령님으로 중생하게 하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또한 죄의 권세와 종노릇에서 건지신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죄의 몸과 육신의 연약함에서 완전히 건지시지는 않는다.”

1항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이 세상에서 죄의 지배와 노예 됨에서 건져주셨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죄의 몸이나 육신의 연약함에서까지 완전히 건져주시지는 않는다.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여전히 죄의 힘과 맞서 싸워야 한다. 그래서 도르트 총회에서 칼빈주의자들은 3항을 통하여 “이 내재하는 죄의 잔재와 세상과 사탄의 유혹 때문에, 회심한 사람들은 자신의 힘에 남겨진다면 이 은혜 안에 계속 굳게 서 있을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견인이 우리에게 달려있다면 영적 삶에서 진보한 사람조차도 결국 은혜의 상태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의존적이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이중보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를 가리키셨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자녀를 그리스도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으며, 성부 하나님의 손에서도 빼앗을 수 없다.(28, 29절)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마귀도 세상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을 실족케 하고, 범죄 하게 하여 은혜에서 떨어지게 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성도가 가진 안전은 하나님과 구원자께서 자신을 붙드시기 때문에 자신은 천국에 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4. 평가 및 결론

4.1. 평가

도르트 신조는 벨기에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를 모태로 하고 있으나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의 죄와 타락 그리고 죄의 비참함과 우리의 구속에 대하여 보다 선명하게 말하고 있다. 또한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가 지니지 못하는 예정과 성도의 견인에 대하여 확실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성례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도르트 총회 이전까지만 하여도 5세기부터 내려오던 펠라기우스 논쟁은 결말이 안 나고 있었고 오히려 알미니우스에 의해 새롭게 단장하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의 자율성과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도르트 신조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비성경적인 주장을 소개하고 이 주장의 오류를 반박하며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하였다는 데에 가치가 있다. 세게 그 어떤 신조도 자신의 주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을 뿐 당시 사조의 잘못된 흐름을 소개하거나 반박하지는 않았다. 다음으로 도르트 신조는 지금까지 분열하고 있던 화란 교회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였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작성한 항변서를 하나님 말씀으로 인정하고 이를 화란 국가교회 내에 채택되도록 교회를 조정하였다. 이에 좌절을 느낀 칼빈주의자들은 항변파들이 주도하고 있던 국가 교회를 탈퇴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1617년 윌리엄 왕의 아들 모리가 항변파가 있는 교회에서 예배보기를 거절하고 이윽고 도르트 총회 때 교회를 하나로 만들려고 하였다. 따라서 도르트 신조는 화란 교회를 정치적으로 하나로 묶고 잘못된 이단적인 신조를 정죄하는 큰 역할을 한 것이다.

4.2 결론

도르트 신조는 교회가 분열되고 이단적인 사상에 병들어 가고 있을 때, 교회를 치유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도르트 총회 이전까지 모든 화란교회는 정치적으로 양분되고 있었고 국가는 분열 위기에까지 내몰려 있었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도 칼빈주의 사상을 지닌 개혁주의자들은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책임과 노력을 주장하는 알미니우스의 입김이 너무 강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르트 총회 때 전 세계에서 모인 대표들은 숫적으로도 우세한 일미니우스주의자들을 제압하고 150번 넘게 회합을 가지면서 심사속고 한 끝에 칼빈주의 사상에 입각한 도르트 신조를 채택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간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과정을 걸쳐 탄생한 도르트 신조는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한 칼빈주의 전체 사상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칼뱅은 예정론을 말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상에는 예정론이 전체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인간의 타락과 현주소,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신학 전방에 흐르고 있는데, 이 도르트 신조에는 이런 칼뱅의 신학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전적인 타락으로부터 시작하여 성도의 견인에 이르기까지 도르트 신조는 칼뱅으로부터 시작된 개혁주의 신학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후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네덜란드를 비롯한 개혁파 교회와 북미 교회 신앙의 표준으로 평가받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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