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더 좋은 교사’를 꿈꾸는 성실한 선생님

45년간 주일학교 교육현장 굳건히 지켜 … “아이들에 인정받는 ‘가슴으로 가르치는 교사’ 될 것”

고급 차량 하나가 미끄러지듯이 앞에 섰다. 차 안에서 제법 계급이 높아 보이는 경찰복 차림의 사내가 내리더니 갑자기 경례를 붙인다. 이게 무슨 일일까 당황스러워하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선생님, 저 모르시겠습니까? 뵙고 싶어서 얼마나 찾았는지 모릅니다.”

이남준 집사(광주지산교회)에게 순간 어렴풋한 추억이 떠올랐다. 잊고 살았던 얼굴, 아련한 이름. 장애가 있어서 말을 더듬고, 교회에 와서도 친구들이나 다른 교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였다.

▲ 이남준 집사는 여전히 더 좋은 교사가 되고 싶은 꿈이 있다. 그는 아이들에게 가슴으로 가르치는 교사, 인생과 신앙의 모델로 삼고 싶은 교사로 기억되기를 소망한다.

청춘기에 섬기던 부산의 주일학교에서 이 집사가 담당하는 반에는 유독 그런 학생들이 많았다. 다루기 힘든 아이들, 가르쳐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들, 어른들로부터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자라는 아이들. 이 집사는 그들을 ‘날개를 잃은 천사들’이라고 부르며, 마치 혈육처럼 아끼고 돌보아 주었다.

바로 그 천사 중 하나가 어엿한 어른으로 자라 건장한 경찰 간부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유난히 애정을 많이 주었고, 자신을 지극히도 좋아하며 따랐던 바로 그 아이였다. 수십 년 만에 고향과 멀리 떨어진 광주 땅에서 이렇게 해후하게 될 줄이야.

45년 주일학교 교사로 살다

이남준 집사가 주일학교 사역에 처음 투신한 것은 열네 살 때의 일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 발로 어느 작은 교회를 찾아가서는 덜컥 주일학교 교사를 시켜달라고 당당히 요청했다. 일꾼이 부족했던 그 교회에서 어린 중학생에게 맡겨준 반사직이 이후 45년간 주일학교 교사로서 살아가게 된 계기가 됐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었다.

어려서 살던 집 바로 옆에도 교회가 있었다. 꼬마 남준의 눈에 교회 목사는 기이한 존재였다. 자신도 가난하기 짝이 없는 살림에 동네 이웃들을 가족 이상으로 섬기는 모습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점점 커나가면서 장애인 가정에 남몰래 휠체어를 가져다 준 것도, 굶는 집안에 쌀을 들여다놓아준 것도 목사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를 닮고 싶었다.

▲ 이남준 집사.

하지만 독실한 불교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그에게 어른들이 교회 다니는 것을 쉽게 허락할 리 만무했다. 궁리 끝에 당시 미션스쿨이던 거성중학교로 입학을 결심했다. 숱한 반대와 핍박을 견뎌내고 어렵게 들어간 학교에서 열심히 예배와 성경을 배웠다. 적극적인 성격으로 반에서는 종교부장을 맡기도 했다.

더 나아가 아직 나이는 어렸지만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었다. 특히 자신보다 어리고 약한 아이들에게 예수님 사랑을 나누어주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스스로 찾아 나선 일이 바로 주일학교 교사직이었던 것이다.

초보 교사의 무기는 기도

열심은 넘쳐났지만 아직 아는 게 없었던 교사 초년병의 무기는 기도였다. 매일 같이 이른 새벽 산에 올라 담임목사를 위해, 자신이 담당하는 아이들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고 내려와서는 새벽예배 시간에 맞춰 교회 종을 울렸다. 선생님의 따뜻한 기도의 손길을 누리며 아이들도 잘 자라주었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더 좋은 교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에 덜컥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는가 하면, 어린이찬양대를 지휘하기 위해 기독음대에 입학해 몸담기도 했다. 이왕 신학교에 들어갔으니 목사가 되라는 권유도 받았지만, 주일학교 교사가 훨씬 더 좋았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평생 놓지 않을 천직이라 여겼다.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광주로 이사한 후에도, 장성하여 군대에 들어가서도 주일학교 교사직을 멈춘 적이 없었다. 이토록 성실한 교사인 동시에 그는 유능한 교사이기도 했다.

교회 내에서 소문난 말썽꾸러기, 개구쟁이, 왕따인 아이들은 죄다 도맡아 가르쳤다. 얼마나 정성을 쏟고 잘 다루었던지, 아이들은 학년이 바뀌어도 선생님 곁을 떠나려들지 않았다. 부서에서도 이남준 선생님이라면 뭐든지 믿고 맡겼다. 담당한 반 인원이 80명에 이른 적도 있었다.

여전히 교육현장에 서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성경퀴즈대회 중이었는데 ‘우리는 누구를 닮아가야 할까요?’라는 문제가 나온 것이죠. 당연히 정답은 ‘예수님’이라고 해야 하는데, 우리 반 아이 하나가 손을 들고서는 ‘이남준 선생님이요!’라고 대답하지 뭡니까? 이 때문에 따로 목사님께 불려가 면담까지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기분은 좋았어요. 아이들에게 인정받는 교사가 되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서 말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 평교사에서 총무로, 부감으로 그리고 부장으로 직책은 바뀌었지만 그는 여전히 현장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는 것을 즐긴다. 시험기간이면 햄버거 피자 치킨 같은 먹을거리들을 사들고 학교를 돌며, 매주 금요일에는 교회 주변 학교들을 찾아가 아이들 전도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어느 부서를 맡든지, 최고의 골칫덩이들은 여전히 그의 몫이다.

요즘도 주일 아침 일찍 예배당으로 출발하기 전, 그는 항상 네 벌의 옷을 챙긴다. 꼬맹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그에게 매달려 타고 오르며, 흐르는 침이며 먹던 음식물까지 마구 묻혀놓는 통에 몇 번씩 옷을 다시 갈아입어야 하는 것이다.

머리에서 머리로 가르치는 교사가 아닌, 가슴에서 가슴으로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키운 아이들이 어느새 어른이 되어 사회에 나가 영어교사도 하고, 경찰도 되고, 목사님으로도 사역하는 중이다.

주일공과 교안은 재산

이남준 집사에게 가장 소중한 재산은 매주 꼬박꼬박 써내려가 45년간 쌓아온 주일공과 교안이다. 또한 그에게는 부서 연중계획표 말고도, 자신만의 시간표를 따로 가지고 아이들에게 때마다 필요 적절한 도움을 주는 노하우도 쌓여 있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도 교사직과 관련해 배울 기회가 생기면 언제나 달려가곤 한다. 더 좋은 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은 아직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365일 내내 꾸준함을 잃지 않는 그를 지켜보며 동역하는 동료 교사들 역시 교사모임에 지각을 한다든가,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대충 준비한다거나 할 엄두를 감히 내지 못한다. 성실함도 그렇게 전염이 된다.

끝으로 이 집사는 ‘양무리의 본이 되라’는 성경말씀이 비단 목회자들에게만 아니라 가르치는 직분을 가진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 믿는다면서 후배 교사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잘 가르치는 교사가 되려면 먼저 아이들과 잘 놀아주는 교사, 품어 안아줄 수 있는 교사, 소통할 줄 아는 교사가 되어야 해요. 아이들은 선생님이 보여주는 삶을 통해 예수를 배우고, 신앙을 배우거든요. 자신이 먼저 변화되는 교사, 행동으로 모범을 제시하는 교사가 아이들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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