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원 목사(전주효성교회)

▲ 윤희원 목사(전주효성교회)

중세를 대표하며 가톨릭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의 본질을 ‘존재함’으로 파악했다. 즉 존재하지 아니하는 신은 신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대립각을 세운 둔스 스코투스는 신의 본질을 ‘의지’로 이해했다. 신의 의지가 없으면 신의 존재도 특히 신의 사랑도 경험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존 칼빈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경험될 수 있는가를 시사해 주었다. 신의 존재로만 신을 인식할 수 없다는 둔스 스코투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 이성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의 의지와 뜻에 따라서 되어지는 것이지 자연 이성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신을 아는 지식은 인간 이성에 근거할 수 없으며 오직 신의 의지에 달려있다고 했다.

이렇게 주지주의 입장에 서 있는 아퀴나스와 주의주의 입장에 서 있는 스코투스는 확실히 신학함과 사유함 그리고 결국은 그 입장에 따라서 ‘행함’이 다르게 되었음을 두말할 필요가 없다. 신학의 출발점을 신의 존재에 두느냐 의지에 두느냐에 따라서 결과도 달라지고 평가도 달라진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나 사상에 대한 비평과 평가는 ‘관점’이 다르면 전혀 상반된 이해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금번 103회 총회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총회에 대한 평가는 달라진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103회 총대로서 금번 총회를 평한다면 총회의 역사상 회무처리 시일보다 하루 반 먼저 마쳤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즉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인 총회를 지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총회보다 이번 103회 총회는 총회장이 된 이승희 목사의 준비가 돋보이는 총회였다고 할 수 있다.

이승희 목사는 총회장으로서 나름대로 많은 준비를 했다. 먼저 권역별로 여론을 듣고, 진행방법을 숙지했으며, 더욱이 103회 총회의 모든 헌의안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개별적인 처리방안을 정하여 놓고 회무를 진행했다. 그 결과 회무 진행과 처리가 비생산적이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는 총회장의 회의 리더십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103회 총회는 무엇을 지향했는가? 생각해 보면 개혁교단의 총회로서 아쉬움이 남는다. 본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묘책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한국교회의 장자교단이요 세계 최대의 개혁교단 총회로서 무언가 아쉽고 부족한 점이 있다.

물론 ‘변화하라’는 주제를 내놓고 총회의 지향점을 제시했지만, 변화에 대한 욕구는 총대들에게 미흡했던 것 같다. 총회장이 빨리 끝나면 집에 갈 때 황금마차(?)를 타고 갈 수 있다는 감언에 총대 모두가 집단 최면에 걸려서 제대로 안건을 심의해 보지도 못하고 마치지는 않았는지 하는 아쉬움이 든다.

즉 수술을 한 후에 제대로 봉합하지 않은 것처럼 아쉬움이 든다. 만일 수술했다면 그 한주간의 시간도 모자라서 시간에 쫓겨서 파회했을 것이다. 그 많은 헌의안을 수요일 저녁 예배 후 2시간 회무 진행을 통해서 은혜롭게 처리했다는 자체가 지향할 것을 지향하는 변화인지 아니면 지양할 것을 지양하지 아니한 변질인지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만일 빠름이 지양할 것을 지향하고, 지향할 것을 지양했다면 우린 103회 총대로서 직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아무리 회무처리에서 목적과 내용, 주체와 동력이 선명했다고 해도 총대로서 깨끗한 삶의 모범, 회의진행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퀘스타보 르 봉은 그의 책 <군중심리>에서 “감정이 과장된 군중은 과장된 감정에만 감동한다. 군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은 웅변가는 과격하고 극단적인 확언을 거침없이 늘어놓아야 한다. 과장하고, 확언하고, 반복하되 이성적 사고에 의해 논증하려는 시도는 일체 말아야 한다는 것을 대중 집회 연설가들이 잘 알고 있는 연설기법이다”고 한다. 분명 103회 총대들에게는 군중심리는 없었다. 그러나 총대로서의 정념(passion), 다른 말로 하면 공유된 감정은 있었다. 지금까지 총회가 너무나 비생산적이었다는 것이다. 이 비생산적인 총회를 적어도 비생산적으로는 진행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총회장은 임원회에 맡길 것은 맡기고, 간혹 정치부로 넘길 것은 넘기면서 탁월한 회의 진행 덕에 우리 총회는 그래도 변화할 수 있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변화하기 위해서 103회 총회는 지금까지 익숙했던 총회의 진행과는 결별하고 전혀 새로운 진행방법으로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총회임원회가 스스로 헌법과 규칙을 지키는 결정을 했다고 하니 참으로 고무적이다.

사람과 단체는 반드시 변화하든지 변질되든지 두 가지 중에 하나는 한다. 변질되지 않고 변화되는 총회에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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