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학 목사(신암교회)

▲ 이상학 목사(신암교회)

시작부터 반야월에 웃는 소리가 가득하다. 주요 상비부의 보고를 받는 긴장된 순간에도 느닷없는 웃음이 터진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이어진다. 아, 그래. 이런 아름다운 선율과 노래가 있었지. 찬송가를 부르면서 더워진 가슴이 공연을 보면서 울렁거린다. 이 귀한 하나님의 선물들을 왜 그동안 외면하고 살았을까. 저절로 신음 같은 탄성이 나온다. 두 남성 테너가 정지용의 <향수>를 노래한다. 순식간에, 환갑 지나서 독자를 얻은 내 아버지가 깊은 기억 저편에서 소환되었다. 제어하기 힘든 감동이다. 슬쩍 눈물을 훔친다. 메마른 영성 언저리에 방치해 두었던 감성이 돋아난다.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믿었습니다.” 약간의 웃음과 적막 그리고 더 작은 소리의 숨은 탄식들. 섬김의 기회를 잠시 미룬 한 총대의 고백은 울림이 있었다. 장내는 숙연하였고 팔에 잠깐 소름이 돋았다가 사라졌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목사인가. 사람을 믿은 불신앙의 범행이 적지 않은 까닭에 얼굴이 붉어진다. 다시 자문하니 목덜미까지 뜨겁다.

금번 총회의 나아진 점은 무엇인가. 웃음과 눈물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그러면 아쉬운 점은 무엇일까. 그 또한 웃음과 눈물의 경계 어디쯤인가에 있다. 함께 웃지 못하고 당황스러운 이가 있다. 속으로는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수가 동의하여도 소수의 심한 반대가 있을 때는 결정을 유보하는 배려 역시 헌법의 정신 아닌가.

‘변화하라!’ 총회안내 리플릿과 회의장 우측 전면에 부착된 현수막의 문구다. 빨강(변) 초록(화) 파랑(하) 노랑(라)은 각 글자의 끝 부분에 살짝 칠해진 네 가지 색이다. 눈이 밝은 총대들은 모두 보았을 것이다. Red, Green, Blue는 빛의 삼원색이다. 줄여서 RGB라고도 표기한다. 색의 삼원색(청록, 진홍, 노랑)은 서로 섞일수록 탁해지면서 검은색에 가까워지는데 이는 다양한 이들이 모였을 때 더 나빠지는 집단에 비유할 수 있다. 하지만 빛의 삼원색 빨강, 초록, 파랑은 모이고 겹칠수록 하얀색에 가까워진다. 둘이 섞이면 오히려 맑아지고 셋 또는 그 이상이 서로를 받으면 더 깨끗해진다. 왜냐하면 빛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세상에 오신 참 빛이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빛에 속하였다.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과 기준을 가지고 종종 서로 다르게 말하고 행동한다. 이합하고 집산한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빛이 계신다. 서로 다른 컬러 때문에 고민할 이유가 없다. 각자의 다름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리고 그 수가 많아지면 질수록, 더욱 주를 닮은 얼굴을 가지게 된다. ‘활짝 웃음’은 거두고 미소만 조금 남기자.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풍랑 이는 바다를 건너신 주님처럼 상처받은 그 사람에게 가자. 그는 틀리지 않았다. 다를 뿐이다.

회의 말미에 로비에서 한 총대를 안았다. 허락을 받고 아무 말 없이 꼭 안았다. 선교지에서 아들을 하나님께로 앞세운 절절한 아비의 뜨거운 가슴이었다. 그 희생이 한국교회의 소망이라는 말은 감히 언급할 수도 없었다.

단언하건대 셋째 날의 미니 콘서트와 장학금 전달식에 이어진 수요예배는 초 단위로 거듭된 리허설을 거친 정교한 노력의 산물이다. 가난한 목사의 자식으로 났지만 올곧게 자라준 대견한 청소년들을 통하여 내일을 본다. 약한 것 밖에 자랑할 것이 없는 목사를 눈물의 기도와 힘에 지나는 충성으로 묵묵히 동역해 준 장로 총대의 노고에 깊이 머리 숙여 인사한다. 조금씩 못난 우리는 서로의 보폭에 발맞추며 가자. 혼자면 더 빨리 가겠지만 길이 멀기 때문에 함께 가야한다. 주님 오실 때까지 이 걸음은 멈출 수 없다.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그렇게 가야만 거룩한 변화에 도달할 수 있다. RGB 현상은 억설(臆說)이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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