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도르트신경 400주년 ⑦도르트회의 결정문 의미-(5) 견인(Perseverantia)

인내를 의심하며 정통신앙에 도전한 항론파 … 도르트 총대들은 인간 의지에 결정되는 믿음을 거절했다

항론파가 제기한 다섯 가지 주장의 마지막은 성도의 견인이다. 여기서 견인이란 끝까지 믿음 안에서 인내함이다. 성도들의 견인이란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끝까지 인내한다는 교리이다. 성도들이 마지막까지 믿음 안에서 견디고야 만다는 정통 교리를 항론파는 의심하고 반대했다.

▲ 이남규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항론파가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부인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마지막 주장 5항 전반부에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자들이 성령의 은혜로 사탄, 죄, 세상, 그리고 육신과 싸우고 승리할 충분한 능력을 소유한다고 말했다. 여기까지는 정통 신앙과 같은 내용이다. 그런데 후반부에서 이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은혜를 상실할 가능성이 있는지 성경을 통해 더 검토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경을 통한 검토’란 사실 정통 신앙을 의심하고 반대함에 대한 표현이다. 그들은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끝까지 인내한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정통 신앙에 반대한 것이다. 항론파의 주장에서 인간 구원의 결정적 구분은 인간에게 달려 있었다. 하나님은 이 땅 위에서 마지막까지 믿음 안에서 인내한 자를 최종적으로 선택하신다. 따라서 지금 믿고 있는 자가 마지막 까지 인내할 지에 대해선 더 기다려 봐야 한다는 내용이 항론파 주장의 핵심이다.
정통신앙이 의심받자 도르트총회는 정통신앙을 변증했다. 견인에 관해서 크게 다섯 가지 쟁점을 말할 수 있다.

첫째, 믿음 안에서 끝까지 인내함이 선택의 결과인가, 아니면 인간에게 맡겨진 선택의 조건인가? 즉 하나님이 선택하셨기 때문에 신자가 끝까지 믿는가? 아니면 신자가 끝까지 인내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택하시는가?

이 문제는 항론파의 첫 주장과 연결되어 있다. 거기서 그들은 선택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했는데, 선택의 대상이 끝까지 믿는 자들이었다. 만일 신자가 믿고 거기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선택하시면 그것이 예정일 수 있을까? 도르트총회에 참석한 총대들은 항론파가 말하는 예정이 예정(praedestinatio)이 아니라 실상은 후정(postdestinatio)이라고 규정했다. 성경이 말하는 예정은 단순히 시간 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선택하심만이 아니라, 구원의 근원과 출발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증언한다.

성경은 구원과 은혜와 좋은 것들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옴을 분명히 말한다. 예를 들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그런데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선물은 능력 없는 선물이 되고 만다. 하나님의 선물은 인간의 의지에 맡겨진 선물이 되고 만다. 인간의 죄된 의지를 이기지 못하는 하나님의 선물이 무슨 말인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고 사도는 증언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다.

항론파의 고민은 견인이 선택의 결과나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하나님이 새언약의 조건으로 말씀하신 믿음은 인간의 자유로운 성취가 아닐 것이라는데에 있다. 견인이 하나님의 선물이 되면, 견인을 새언약의 조건으로 말씀하신 하나님과 모순된다고 항론파는 주장한다. 하나님은 믿으라고 요구하시고, 믿음 안에서 견인하는 자가 구원을 얻지 않는가? 과연 그렇다. 그런데 요구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요구하신 것을 친히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라고 하시고, 회개함과 죄사함을 주시며(행 5:31),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행 11:18)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렘 32:40) 하신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항론파는 믿음과 견인의 요구를 인간이 스스로 성취해야할 조건으로 만듦으로써 은혜언약을 행위언약으로 만들었다.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끝까지 은혜로 남긴다.

두 번째 쟁점에 들어가기 전에 기억할 내용은 항론파가 초자연적인 은혜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항론파도 신자가 끝까지 믿음 안에서 인내하도록 하나님이 초자연적 은혜를 주신다고 말했다. 다만, 하나님께서 초자연적 능력과 은혜를 풍부하게 주실 때, 끝까지 믿음 안에서 인내함이나 인내하지 않음은 인간의 의지에 있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것이 두 번째 쟁점이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은혜가 어느 정도까지 역사하는 것인가? 의지를 변화시키는 은혜인가? 아니면 의지만은 변화시키지 못하는 은혜인가?

항론파의 논리에 따르면, 하나님의 초자연적 은혜는 사람의 영에 들어가서 깨닫게는 하지만 영혼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거나 악한 의지를 선하게 변화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여 영혼을 변화시키고 의지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믿음의 습성을 만드는 일은 인간이 하는 일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얼마나 모순인가? 어두운 마음을 비추시고 새로운 성향을 깨우시는 성령이 인간의 영혼을 그대로 두실 수 있는가? 만일 인간에게 맡겨지는 인내라면 죄된 본성을 가진 인간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인간이 실패하지 않는 이유는 그에게 하나님의 썩지 않는 씨가 주어졌기 때문이다(요일 3:9). 신자는 견인을 스스로 성취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믿음의 시작, 진보, 성장, 지속이 있다.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을 향해 변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시기 때문이다(빌 2:13). 하나님은 초자연적 은혜를 주신 후 인간의 반응에 맡겨두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내하도록 도우시고 세우시고 보존하신다. 성령님의 은혜로 성도는 인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내하고야 만다.

세 번째 쟁점은 참된 신자가 무거운 범죄로 인해서 은혜와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참된 신자가 죽음에 이르는 죄를 범할 수 있는가? 참된 신자가 어느 순간 의롭게 하는 믿음과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는가? 아니면 참된 신자는 결코 믿음과 구원에 떨어질 수 없는가?
도르트총회에 참석한 총대들이 항론파에 동의한 점은 참된 신자들도 범죄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단순히 약하여서 죄짓는 것, 원하지 않는데도 죄를 짓는 것, 이런 것만이 아니라 양심에 반하여서 원하면서도 범죄할 가능성이 있음에 동의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는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믿음을 억압할 수도 있고, 은혜와 구원에서 실족할 수 있다.

그러나 도르트 총대들은 영생으로 선택되어서, 믿음을 선물로 받고, 성령 안에서 보호받는 참된 신자들이 성령을 잃어버리고 믿음과 구원에서 완전히 분리된다는 주장에는 반대했다. 이런 주장은 하나님의 사역을 능력 없는 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이 믿음 안에서 끝까지 인내함은 오히려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한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 37:24)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참된 신자들은 하나님의 보호와 능력 때문에 구원에서 분리되지 않고 믿음 안에서 끝까지 인내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네 번째 쟁점은 이 생애에서 견인에 대한 확신이 있는지, 아니면 없는지에 대해서다. 항론파는 견인의 확신을 특별하고 이례적인 경우로 제한했다. 특별하고 이례적인 계시가 있어야만 견인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가? 아니면 견인에 대한 확신이 신자들에게 공통적인 일인가? 나아가서 신자들에게 견인의 확신이 과연 필요한가? 견인의 확신이 오히려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믿음은 성장할 때도 있지만 작을 때도 있다. 그처럼 견인의 확신도 강할 때가 있고 약할 때가 있다. 나아가 심각한 죄나 시험 중에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일시적으로 잃고 견인의 확신이 거의 사라지기까지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자들은 믿음의 분량에 따라 견인에 대해 확신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믿는 자가 어떻게 자기가 구원받을 것을 확신할 수 없겠는가?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할 것을 믿는 자가 자신의 영생을 확신할 수 없겠는가? 견인의 확신에 대한 부인은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는 고백을 허무하게 만든다.

특별한 계시를 받은 적은 수의 특별한 신자들만이 구원과 견인에 대해 확신한다는 주장도 성경과 어긋난다. 신자들 각자가 성령의 특별한 계시를 받았으니,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고전 2:12). 성령을 받은 자들은 또한 확신케 하는 성령을 받았으니,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롬 8:16).

이 견인의 확신이 필요없다고 하는 자들에게 도르트총회의 총대들은 시험과 영적 전쟁의 위험의 상황을 보여준다. 신자가 만나는 수많은 위험 속에서 견인의 확신 없이 어떻게 그 위험을 지날 수 있겠는가? 로마서 8장은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권하며,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확신 가운데 세우며 견디게 한다. 도르트신경은 견인의 확신이 교만과 안일함에 빠지게 하지 않고, 겸손, 경외, 경건, 싸움에서 견딤, 기도, 고백,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함의 참된 근원이 된다고 고백한다(12항). 따라서 견인의 확신을 의심으로 만드는 항론파의 주장은 절망의 가르침이라고 총대들은 정죄한다.

다섯 번째 쟁점은 일시적 믿음과 견인하는 믿음의 종류에 대한 것이다. 일시적 믿음과 견인하는 믿음은 같은 종류인가? 아니면 다른 종류인가?

항론파에게 일시적 믿음이나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같은 믿음을 일시적으로 소유한 것인지, 끝까지 소유한 것인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즉 믿는 시간이 짧은가 긴가라는 시간의 길이의 차이일 뿐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마지막까지 믿는 것을 보고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그를 영생으로 선택하신다. 만일 일시적 믿음을 가진 자라면 그는 일시적 선택의 대상일 뿐, 최종적 선택의 대상은 아니다. 항론파에게 일시적 믿음과 견인하는 믿음이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이유는 결국 이 둘이 인간의지에 돌려지기 때문이다.

도르트 총대들은 항론파의 이런 불확실한 선택과 인간 의지에 돌려지는 믿음을 거절했다. 일시적 믿음과 견인하는 믿음의 차이는 단순히 시간의 길이의 문제가 아니다. 둘은 종류가 다르다. 일시적 믿음은 처음부터 의롭게 하는 믿음이 아니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도 아니다. 따라서 구원하는 믿음과 그 종류가 다르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 곧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은 성령에 의해서 일으켜진 믿음이기 때문이다.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요(롬 8:28), 구원의 황금사슬 안에서 부르심을 받고, 의롭게 되고, 영화롭게 되었다(롬 8:30). 이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 부르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어서 자랑하지 못한다(엡 2:8~9). 우리는 그의 만드신 작품이다(엡 2:10). 성령에게서 기원하는 견인하는 믿음은 뿌리를 갖지 못하는 일시적 믿음과 종류가 다르다(마 13:20).

항론파의 도전은 사실 그 전에도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 펠라기우스주의와 반펠라기우스주의 의해서, 중세의 인간 공로에 의존한 구원론에서, 종교개혁 시대에 에라스무스에 의해서 도전 받았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도 이 도전은 계속되어 하나님에 돌아갈 영광을 손상시키고, 신자들의 실제적인 경건과 위로에 상처를 입힌다. 400년 전 도르트총회가 오래된 이 도전을 반박했고 오고 오는 교회에 전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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