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이슬람제국과 비잔틴제국은 634년 사해 근처에서 첫 전투를 벌였다. 그 후 수차례 더 격돌을 했는데 그때마다 이슬람의 옴미아드 제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비잔틴제국은 중동 지역을 빼앗긴다. 당시 옴미아드 왕조의 설립자인 칼리프 무아위야는 674년 제 1차 콘스탄티노플 침공을 감행한다. 이때 비잔틴 군대는 ‘그리스의 불’로 알려진 화염 방사기를 고안하여 이슬람군대의 예봉을 꺾는다. 옴미아드 왕국은 철옹성 콘스탄티노플의 견고함만 확인한 채 물러간다. 그 후 717년 이슬람은 1600척의 군함과 1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제 2차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감행한다. 군대 12만은 비잔틴의 육군과 해군을 압도하는 군사력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는 비잔틴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매섭고 혹독한 겨울 추위가 비잔틴 군대의 승리 요인이었다. 무더위의 사막에서 올라온 이슬람 군대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후퇴해야 했다.

이 전투가 끝나고 세계사의 운명을 가른 전투가 투르 전투였다. 때는 732년이었다. 이 전투는 기독교의 서유럽과 스페인을 정복한 무슬림 사라센 제국인 안달루시아 왕국과의 전투였다. 안달루시아의 총독 압둘 라흐만은 대군을 이끌고 스페인의 피레네산맥을 넘어 당시 기독교 서유럽을 대표하는 신흥강국 프랑크 왕국으로 침공했다.

이에 맞선 프랑크 왕국의 사령관은 샤를 마르텔이었다. 그는 카를 마르텔로도 불리는데 샤를과 카를은 같은 이름의 불어식과 독일식 발음이다. 무패의 승리를 자랑하던 샤를 마르텔은 프랑스의 투르와 푸아티에에서 전투를 벌인다. 기병위주의 안달루시아 군대는 8만이었고 프랑스 군대는 3만의 보병으로 현저한 열세였다. 이 전투에서 샤를 마르텔은 대승을 거두었고 이슬람은 압둘 라흐만을 잃은 채 피레네 산맥을 넘어 도주해야 했다. 그 후 이슬람 군대는 1492년 레콩퀴스타 즉 국토탈환운동으로 무슬림을 스페인에서 몰아낼 때까지 존재했지만 다시는 서유럽을 침공하지 못했다.

프랑스의 명장 샤를 마르텔은 샤를마뉴 대제의 할아버지이다. 역사가 기번은 “만약 투르전투에서 이슬람이 승리했다면, 서유럽의 주 종교는 이슬람이 되었을 것이고 옥스퍼드대학에서는 코란을 주교제로 가르쳤을 것이며 서구인은 하루 다섯 번 메카를 향하여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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