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도르트신경 400주년 ⑥도르트회의 결정문 의미-(4) 불가항력적 은혜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고 정확하며 효과적으로 선택된 자들을 중생케 함으로 실제적인 믿음을 얻게 하신다

▲ 이상웅 교수(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조직신학)

17세기 초반 화란개혁교회는 알미니우스(Arminius, 1560~1609)와 그의 추종자들이 벨직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와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서(Heidelberg Catechism)에 담긴 개혁교회 교리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알미니우스 사후인 1610년에는 ‘5가지 항론파 조항들’(The Five articles of Remonstrance)을 국회에 제출하기까지 하게 됨으로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국내 상황상 바로 이 문제를 다루지 못하다가 마침내 1618년에 국가적인 개혁파총회를 열고 알미니우스주의의 도전에 응답할 수 있게 되었다. 화란신학자들뿐 아니라 유럽의 개혁신학자들이 도르트(레흐트)에 모여 반년이 넘는 토론 끝에 결정하여 공표한 것이 바로 도르트신경(Canons of Dort)이다. 흔히들 도르트신경에 담긴 교리 요점들을 ‘칼빈주의 5대 강령 혹은 요점들’(Five Points of Calvinism), ‘은혜의 교리들’ 등으로 부르거나, 화란의 국화인 튤립의 철자에 맞추어 ‘TULIP교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늘날 많이 사용되고 있는 TULIP이라는 약칭은 20세기 초반까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1932년에 출간된 로레인 뵈트너의 <칼빈주의 예정론>에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확인되어진다. 튤립이라는 머리글자에 맞추려 하다 보니 때때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지들도 생겨났다. 그 가운데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네 번째 요점 ‘불가항력적 은혜’(I-Irresistible Grace)도 오해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신경 본문의 내용을 통해 정확한 이해에 이를 필요가 있고, 불필요한 오해를 경계하고 그러한 오해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

1. 알미니우스 신조 제4조- ‘저항할 수 있는 은혜’

도르트신경은 5조 혹은 5요점으로 구성되어 있다(원 라틴어에는 Head에 해당하는 caput라는 단어를 씀). 1조는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를 다루고, 2조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인간의 구속을 다루며, 3조와 4조는 함께 묶여져서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유효적인 소명과 회심에 대해서 다루며, 5조에서는 견인 교리를 다룬다. 3/4조가 함께 다루어진 것은 항론파가 제출한 3조와 4조는 따로 다루기보다는 함께 다루어야만 정확하게 이해하게 될 뿐 아니라 정확하게 논박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C. 프롱크). 신경 3/4조는 총 17항으로 되어 있는데 1~5항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에 대해 다루며, 6~17항은 전적인 타락의 결과 영적으로 무능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데 드러나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성을 상술해 주고 있다. 1895년에 간행된 <칼빈주의 요점들>에서 로버트 댑니(Robert L. Dabney)는 ‘유효적 소명 혹은 중생’이라는 제하에 3/4조 6~17항을 다루지만, 20세기에 통용되기 시작한 TULIP 약칭에서는 “불가항력적 은혜 즉, 저항할 수 없는 은혜”라고 표현하게 되었다.

이 조항들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알미니우스파가 제시한 4조항의 전문을 먼저 읽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이 은혜는 모든 선의 시작이며 계속이며 또 성취이므로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선행(先行)하며 도우며 각성시키며 계속되며 협력하는 은혜 없이는 선을 생각하거나 뜻할 수 없으며 또한 악의 유혹은 견뎌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선한 행위와 운동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돌려야만 한다. 그러나 그 은혜가 작용하는 양식에 있어서는 그 은혜를 사람이 거절할 수 있는 것이니, 성령을 거역하는 많은 사람에 관한 기록은 사도행전 7장과 다른 많은 곳에서 나타난다.”(이장식 역)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 항론파 조항 가운데 우리는 “그러나 그 은혜가 작용하는 양식에 있어서는 그 은혜를 사람이 거절할 수 있는 것이니”라는 구절을 주의해서 봐야 한다. 참고를 위해 영역문을 소개한다면 “but with respect to the mode of operation, grace is not irresistible”(P. Schaff)이다. 예정에 있어 선견된 인간의 믿음을 염두에 두고 예지 예정(predestination by foreknowledge)하셨다고 주장했던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4조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고 충분히 인정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결국에는 저항할 수 있는 은혜(resistible grace)라고 제한을 가한 것이다. 이러한 제한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취사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높은 평가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2. 개혁파의 답변-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이루어진다.

다루기에 미묘했던 항론파 신조 4조에 대해 개혁파신학자들은 심도 있는 토론을 통해 전적인 타락 때문에 영적으로 전적 무능력에 빠진 사람의 구원은 인간의 자력 구원이나 협력 구원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선언하고(3/4조 1~5항),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역사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12항목(3/4조 6~17항)에 걸쳐 상술해 주었다.

신조의 내용을 항목별로 읽어 보면서 신경이 어떻게 성경적인 구원론을 잘 개진하였는지를 확인해 보도록 하겠다. 6항에서는 인간에게 주어진 본성의 빛이나 율법 수여만으로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신구약에 담긴 복음을 전하시고 이 소식을 믿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신다고 한다. 7항에서는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비밀스러운 뜻을 택한 백성에만 계시하신 것은 그들이 가진 어떤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하심과 무조건적인 사랑에 기인할 따름이다”는 점을 밝히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가 할 일은 “겸손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은혜를 받아들이고, “이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대해서는 꼬치꼬치 캐물으려는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경계한다.

이어지는 8항~10항에는 유효적 소명(effectual calling)에 대해 서술한다. 8항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소명(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 나와야 하며, 그렇게 나오는 자 모두에게 “영혼의 안식과 영생을 분명히 약속”하셨다고 선언한다. 9항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깨닫지도, 회개하지도 않는 자들의 경우는 하나님이나 복음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 자체에 있음을 적시한다. 즉 생명의 말씀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다가 환난이나 유혹에 넘어져서 떨어져 나가는 자들과 같은 경우이다. 반면에 (유효적으로) 부름받은 자들이 취해야 할 자세는 10항에서 안내되어지는데, “복음에 의한 부름에 순종하여 돌이킨 사람들은 그것의 원인이 자유 의지를 잘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착각하면 안 되고, 오로지 모든 원인이 “오직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하신 하나님께만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매 그들을 부르시고 믿음을 주셔서 돌이키게 하심으로 어두움의 권세에서 구해 주시고 하늘나라와 연결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소명자들은 오로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 합당하다.

11항에서는 하나님께서 택자들 속에서 어떻게 구원을 이루시는지를 설명해준다. 하나님은 택자들에게 “외적으로 복음이 선포되도록 하실 뿐 아니라 성령으로 강하게 역사하사 하나님의 영에 속한 일들을 이해하며 분별토록 하실 뿐만 아니라, 새롭게 하는 영으로서 사람의 깊은 곳에까지 임하셔서 닫힌 마음을 열게 하시고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마음의 할례를 이루시며 죽었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악하고 불순종하고 완악한 마음을 선하게 순종하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키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힘과 능력을 주셔서 마치 나무가 열매를 맺듯이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맺게” 만드시기도 하신다. 이처럼 11항은 외소를 통한 유효적 소명과 중생과 회심의 역사뿐 아니라 선한 삶의 열매 맺음까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한 것임을 밝힌다. 이어지는 12항에서는 택자들 가운데 역사하시어 “죽음에서 부활의 새 생명을 얻도록 하신 것은 성경에서 강조하는 중생케 하는 힘”에 의한 것임을 다시 강조해준다. 특히 이 항목에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은 ‘도덕적 권면’이라고 하는 알미니우스주의자들에 반대하여 중생은 “초자연적이고 가장 능력 있으며 동시에 가장 기쁘고 놀라우며 신비스럽고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라고 답변을 해준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이 놀라운 일은 분명하고 정확하며 효과적으로 중생케 함으로 실제적인 믿음을 얻게 된다”는 점을 적시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중생하여 새 사람이 된 자들만이 “받은 은혜로 인하여 믿고 회개함에 이른다고 말함이 옳은 것”이라고 밝히 말한다. 13항에서는 이러한 성령의 역사에 대해 우리 신자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은혜를 체험한 자들이 “구세주를 믿고 사랑하도록 하기에는 충분함”을 말한다.

이어지는 14항에서 신경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명시적으로 설명해준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실제로 주시고, 불어넣으시고, 주입하시기” 때문에 선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사람이 믿을지 안 믿을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믿으려는 의지와 믿음 그 자체를 주신다는 의미에서 선물”이라고 밝히 말한다. 이러한 믿음의 선물을 받은 자들이 그 은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어지는 15항은 상술해 준다. 신자들은 그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만 오로지 감사드려야 한다는 것, 사람 속 깊은 곳을 서로가 알지 못하기에 신앙을 밖으로 고백하고 그들의 삶을 갱생해 나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가장 호의적으로 판단하고 말할 것”이며, 아직 부르심을 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는 위하여 기도를 할 것이요 결코 그들에 대해 우쭐한 마음이나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해서 읽어야 할 항목은 16항목인데 이 항목에서 신경은 “중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영혼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느냐를 신중하게 밝혀주기 때문이다. 은혜는 사람을 목석처럼 취급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의지와 의지의 속성들을 파괴하거나 꺼리는 의지를 힘으로 강압”하는 방식으로 일하지 아니하신다. 오히려 중생케 하시는 은혜는 “사람의 의지를 영적으로 소생하게 하고, 치료하며, 교정하고, 기쁨으로 복종하게 하며 동시에 힘을 다해 복종”하게 하신다. 성령의 역사로 반역과 저항이 지배적이던 영혼에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온 진심어린 순종이 우세”해 지기 시작하며, “의지의 참되고 영적인 회복과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마지막 17항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역사는 은혜의 방편들을 “배제하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사용하신다”는 점을 역설한다. 특히 복음을 “중생의 씨와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 제정하셨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방편들을 주시고, 그 방편을 통해 “구원하는 열매와 효과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의 방편을 합당하게 부지런히 활용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도르트신경 3/4조 6~17항에서 개진되어진 내용은 우리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는 1~5항에서 다루어진 인간의 전적 타락과 전적 무능력에 대한 성경적 교의를 전제로 한 것이다. 스스로 파멸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되, 복음을 통해 유효적 소명을 주시고, 중생케 하시며, 믿고 회개하는 데 이르게 하실 뿐 아니라 심지어는 선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하신다는 것을 신경은 강조한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은혜는 영원한 하나님의 선택의 사랑에 근거하여 택자들 가운데 실제로 적용되어지는 것이기도 하며, 또한 5조에서 제시 되는대로 성도의 견인(堅忍)까지 보장해주는 총제적인 은혜인 것이다. 혹은 “우리 구원의 끊어질 수 없는 황금 사슬”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는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찬송하며,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위하여 분투노력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데로 나아가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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