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도르트신경 400주년 ④ 도르트회의 결정문 의미- (2) 무조건적 선택

하나님의 선택은 완전하며 무조건적 … 구원은 받는 자의 믿음이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에서 온다

도르트 국제 총회가 열린 계기는 1604년 네덜란드 레이든 대학에서 있었던 두 명의 신학교수 고마루스(F.Gomarus)와 아르미니우스(J.Arminius)의 예정론 논쟁이었다. 아르미니우스는 박사과정 수업 시간에 제네바 신학자들의 예정론을 비판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근거로 한 무조건적인 예정을 비판하였고, 믿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시게 하는 전제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고마루스는 하나님의 예정은 오직 그 분의 뜻과 작정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논쟁의 중심에는 선택이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진 것인가, 혹은 택함받은 사람에게 어떤 조건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두 신학자의 논쟁은 확산되어 국제 총회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신조는 이 논쟁점을 첫 번째 주제에서 다루고 있다.

신조의 첫 번째 주제는 ‘하나님의 예정에 대하여(De divina preadestinatione)’이다. 이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예정을 설명하는 18개의 조항과 교회가 받을 수 없는 잘못된 내용을 9개 조항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중에서 예정에 대한 18개 조항은 내용에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인류의 타락과 복음에 대하여(1~6항), 두 번째는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에 대하여(7~11항,15항), 그리고 마지막은 선택 교리의 유익과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다(12~18항).
신조는 예정을 다루는데 있어서 예정 교리를 설명하는 것 못지않게 그 가르침이 성도와 교회에게 어떤 유익을 줄 수 있는지를 비중있게 제시한다.

1. 인류의 타락과 복음(1~6항)
신조는 먼저 왜 인류에게 하나님의 복음과 주권적인 선택이 필요한지를 설명한다. 그것은 온 인류가 처하게 될 타락과 심판의 상태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으므로 모두가 멸망 받아 마땅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 전체를 죄로 인하여 정죄하여 심판하신다고 할지라도 결코 불의한 일이 아니다(1항). 이 전적인 타락은 개혁파 예정 교리에 있어서 중요한 전제이다. 인류의 타락을 얼마나 심각한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예정 교리의 성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신조는 모든 인류가 예외없이 정죄와 멸망 속에 있다고 선언한다. 부패한 인류의 상황이 절망적인 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은 무조건적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구원의 복음을 제시하셨다. 그 분은 구원자인 성자를 보내시고(2항), 원하는 사람에게 복음과 믿음을 허락하신다(3항). 여기서 신조는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그 분이 원하는 자들에게 주신다고 한다. 이것은 다음의 선택 교리와 연결될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믿음으로 예수를 구원자로 받는 자는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진노가 임할 것이다(4항).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사람 안에 있는 죄와 불신앙 때문이다(5항). 성경과 신조는 사람이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스스로 복음을 믿을 수 없는 불신앙 속에 있음을 전제하였다. 그러므로 복음을 거절하여 심판에 처하게 될 자들은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와 불신앙을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신조는 믿음과 선택을 연결하는 중요한 실천적 문제를 다룬다.

타락한 인류 중에서 어떤 사람은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아 구원에 이르고, 어떤 사람은 받지 못한다. 그러면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가? 이에 대한 신조의 대답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으로부터(ab aeterno ipsius decreto)’이다. 사람은 누구도 그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자를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강권적인 은혜로 택자의 마음을 열어서 복음을 향한 믿음을 갖게 하신다(6항). 이로서 믿음과 구원을 앞서는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로 넘어간다.

2. 무조건적인 선택과 구원(7~11항) 그리고 유기(15항)
신조 7항은 선택의 정의를 다루고 있는데, 내용에 있어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이 선택은 세상의 창조 전에 이루어진 것인데,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멸망에 처하게 될 인류 중에서 어떤 사람을 택하신 것이다. 둘째, 선택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으로 인하여 택함을 받았으며,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다. 셋째, 택함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와의 교통 안에서 소명과 칭의, 성화와 영화-즉 구원의 서정을 거쳐서-에까지 이르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신조는 선택을 ‘인류의 타락과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택자들이 누리게 될 구원의 내용’으로 설명한다. 이 정의에서 선택은 구원론적이며, 구속사적인 이해 위에서 전개되고 있다. 당시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자들은 예정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큰 두 가지 논리적 틀을 사용했다. ‘타락 전 선택론(Supralapsarism)’과 ‘타락 후 선택론(Infralapsarism)’이다. 신조의 내용은 그 중에서 ‘타락 후 선택론’을 중심 이해로 두고 있다. ‘타락 후 선택론’은 구원론적인 성격을 전면에 드러낸다는 강점이 있다. 7항에 나타난 선택에 대한 설명이 이 특징을 따르고 있다.

선택에 대한 정의와 함께 신조는 두 가지를 강조한다. 이 두 가지 내용이 선택의 이해에서 핵심적이다. 첫째, 하나님의 선택에는 사람의 어떠한 조건도 없었다. 부패하여 멸망하게 될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예지된 믿음’이나 ‘믿음의 순종’, 그리고 ‘어떤 거룩이나 선한 성향’이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사람이 선택과 구원을 위한 어떤 조건이나 공로를 갖출 수 있다는 주장은 설 자리가 없다. 택함 받은 자들 역시 유기된 자들보다 조금도 더 낫지 않다. 이로 인하여 선택과 구원에 있어서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원인과 공로를 돌리려고 하는 모든 가르침, 즉 펠라기우스주의, 반(semi)펠라기우스주의와 같은 가르침들이 제외된다.

둘째, 사람의 공로에 대한 배격은 선택의 유일한 원인이 하나님의 기뻐하심(beneplacitum)이라는 중심 내용으로 나아간다(10항). 모든 선택과 구원의 시작과 진행과 완성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분의 선택은 완전하며 무조건적이다. 다른 조건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도가 가지게 되는 믿음과 선한 행위, 거룩한 성향은 선택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가? 믿음과 선행들은 선택의 조건이 아니라, 성도가 받게 될 은혜의 결과물들이다(9항). 그러므로 그러한 결과물들이 선택의 전제가 된다는 것은 은혜의 절대성을 파괴하는 것이며, 성경의 가르침(롬 9:11-13)과 반대된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된 고마루스와 아르미니우스의 논쟁, 혹은 반항론파(Contra-Remonstranten)와 항론파(Remonstranten) 사이의 논쟁에서 핵심이 되는 문제였다.

선택에 비해서 유기에 대한 내용은 간략하다. 타락한 인류 중에서 얼마가 택함을 받았을 뿐이며, 나머지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되어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부패 속에서 범죄하여, 결국 심판을 당하는 것으로 작정되었다. 그러나 이 심판의 근거는 그 자신의 부패와 범죄이다(15항).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멸망의 이유를 돌릴 수 없다. 신조는 전체적으로 선택을 설명하는데 주력한다. 그러나 유기 역시 성경의 가르침이기에 배제하지 않는다. 신조는 선택과 유기 사이에 논리적 균형보다는 성경의 가르침의 비중을 충실하게 따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이로 인해서 신조의 예정론은 은혜의 측면에 집중되어 있다.

3. 성도와 교회를 위한 유익(12~17항)
암스테르담에서 목회를 했던 아르미니우스는 개혁파 교회의 예정론이 성도들에게 해를 끼친다고 생각했다. 예정론이 하나님을 불의한 죄의 원인자로 만들며, 성도들을 게으르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조는 예정 교리가 성도와 교회에게 큰 유익을 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예정론의 실천적인 유익은 무엇인가? 신조는 먼저 성도가 그 자신의 선택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를 다룬다. 하나님의 선택이 있으나 그 선택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다면, 이 교리는 오히려 성도들을 두려움 속에 밀어 넣을 것이다. 신조는 ‘그리스도를 향한 참된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자녀의 경외감’, 그리고 ‘죄에 대한 탄식과 의를 추구함’ 등을 선택의 증거로 제시한다(12항).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은 이러한 열매들을 마땅히 가질 것이다.

이 이해는 (초기 종교개혁자들 이후에 활동한) 16~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이 선택의 확신에 대하여 사용하였던 원리인 ‘실천적 삼단논법(Syllogismus practicus)’이다. 어떤 성도가 선택을 받았는지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의 믿음과 내적인 변화와 삶으로 증명된다고 하는 것이다. 신조는 선택의 확신을 성도들의 특별한 체험의 영역에 두지 않는다. 오히려 성도가 일반적으로 누리는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삶에서 찾게 한다. 선택의 확신은 멀리 있지 않다.

예정론이 성도에게 주는 가장 큰 유익은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의 겸손과 그 분을 향한 사랑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가 자신이 부패하여 멸망에 처할 수 밖에 없는 자였으나, 주님의 순전한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택 교리는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손해지며, 그 분께 감사와 찬양을 올리게 한다. 성도는 이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욱 하나님께 충성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13장).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정론은 교회 공동체를 위한 가르침이라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 신조는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 이 선택 교리는 교회 공동체가 함께 공유해야 할 은혜의 내용이다. 신구약 시대의 교회들이 선택 교리를 가르친 것처럼, 매 시대마다 이 선택에 대한 가르침을 선포해야 한다(14항).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들의 위로를 위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둘째, 아직 충분한 선택의 확신이 없는 성도는 절망할 것이 아니라 내적인 열매가 자라기까지 인내해야 한다. 신조는 확신이 충분하지 않은 어린 성도들에게 인내심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은혜를 구할 것을 권면한다(16항). 내적 확신은 자라야 하는 것이며, 아직 충분한 확신이 없을지라도, 예수께 긍휼과 확신을 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은혜가 임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 언약에 따라서 믿는 자의 자녀가 택함 받았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17항). 여기서 선택은 언약과 떨어질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선택 교리가 언약과 함께 함으로서 단순히 개인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기 위한 교리가 된다.

4. 은혜의 하나님께 드리는 교회의 찬양(18항)
하나님께서 온 인류 중에 구원받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별하셨다는 예정 교리는 종종 냉혹한 가르침으로 비판받아 왔다. 그러나 신조는 예정 교리가 구원을 위한 교리임을 가르쳐 준다. 온 인류가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다. 모두가 멸망당하는 것이 정당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서 어떠한 자들을 택하여 구원의 은혜를 주신다. 그리고 그 구원의 은혜는 받는 자의 믿음이나 자격, 혹은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과 기뻐하심에서 오는 것이다.

예정론은 교회가 누려야 할 은혜의 교리이다. 구원의 은혜를 오직 하나님께만 둘 때, 성도는 겸손해지며 그의 구원은 견고해 진다. 견고함 위에 선 성도와 교회는 모든 고난 속에서 구원주이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정 교리는 교회의 모든 투쟁과 충성 후에 이 모든 은혜의 시작과 완성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가르쳐 준다. 그 때 성도와 교회는 은혜의 하나님께 감격과 기쁨의 찬양을 올려 드리게 될 것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 찬양과 영광은 오직 은혜와 구원의 근원이신 삼위일체께만 합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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