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대담한 낙천주의자] ③불만족과 불완전한 세상을 살아가는 참 지혜, 예수

넷째 마당: 인간, 공동(空洞)의 부르짖음(전도서 6:1~7:14)

 

도전 

재물, 부요, 존귀, 자녀, 그리고 장수... 인간은 행복의 조건들을 부족함 없이 누리더라도 결코 그것들만 가지고는 만족한 마음으로 살고 죽을 수 없다. 존재의 질문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 궁극적 목적이 무엇이냐’라는 철학적 질문 앞에 솔직하게 서면, 그래서 그 질문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면, 결국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현실에 절망하게 된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만 못하지 않은가”하고 한탄하게 된다(6:1~6.). 

인간이 이렇게 아무리 추구하고 얻어도 만족할 수 없는 이유는 그에게 생래적 공동(空洞), 해 아래 세상이 채울 수 없는 공동이 있기 때문이다(6:7, ‘식욕’이 공동이다). 알고 보면 바닥없는 탐욕의 원인은 이 생래적 공동에서 비롯된다. 수많은 호조건을 눈에 보이는 대로 다 지니고 한 세상을 사는 재력가든, 별다른 혜택 없이 그저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근근이 연명하는 빈곤한 자든 이 근본적 공동을 채우지 못한다면 바람 잡는 인생을 산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6:8~9).  

사실 이 천래의 공동은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인식할 수밖에 없는 무엇이다. 이것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또는 아무리 채우려 해도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는 강렬한 공허의 공간이다. 불행히도 인간은 이 공동에 어떻게 대면할 줄 몰라 허둥대다가 죽는 존재일 뿐이다(6:10~12).

 

반전 

이 공동은 바로 하나님 부재, 영원한 생명의 부재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영생의 임재를 만끽하며 사는 신자, 따라서 지금 여기를 영원에 잇대어 살아내는 하나님 경외자는 죽음 저편뿐 아니라 이편까지도 모든 시간과 공간의 사건이 하나님에 의해 아름다운 작품으로 지어져 가고 있음을 믿는다(3:11~14). 

그렇기에 이 영생의 희열에 찬 신자는 명예로운 죽음이 향수로 덧칠한 생존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7:1). 반면 영생에 잇대어 살지 않는 사람의 죽음은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 죽음은 모든 허무의 궁극적 원인(3:19)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잔칫집과 혼인집보다는 죽음 너머의 영생을 확인하는 초상집을 더 좋아한다. 잠시 육체적 이별을 겪으나 영원한 생명과 내세 천국을 확인하여 뜨겁게 감사하게 되는, 그 초상집의 슬픔과 근심을 더 좋아한다(7:1~4). 

누가 참 지혜자인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주권적 역사를 굳게 의지하며 지상에서도 천국을, 현세에서도 영원을 사는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3:1~15. 5:1~7. 6:18~20) 

이 생명이 없는 인생의 노래와 웃음은 괴로운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7:5~7). 인간은 본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도록 창조됐다. 그러나 타락하여 가슴에 영원한 공동이 뚫리자, 그 공동을 탐욕(뇌물)으로 채워 보고자 몸부림치는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7:7). 만사의 끝은 내세의 영원, 하나님의 완성작품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현세의 시작보다 낫다. 

경건한 지혜자라면 하나님의 영원한 완성을 믿어 인내함으로써 교만과 분노에서 터져 나오는 미련한 언사를 제어해야 한다. 이 영적 지혜가 없는 사람은 “차라리 옛날이 오늘이나 내일보다 낫다”라는 말을 쏟아 낸다. “믿어 봤자 다 헛수고야. 희망 따윈 걸지 마”라는 불신앙을 토로한다. 진정한 하나님 경외의 지혜를 지닌 신자라면 이런 생각조차 할 수 없다(7:8~10). 하나님 경외의 지혜는 진정 아름답고 유익하다. 그것은 돈 따위의 순간적 위로와는 차원이 다른 힘이다. 이 지혜만이 그 소유자를 진정으로 살리기 때문이다(7:11~12). 

해 아래의 세상만으로는 답이 없다. 그것은 애초부터 뒤틀려 있다. 거기에는 형통과 곤고가 온통 뒤범벅되어 있고, 사람은 그 전후 관계를 능히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 경외의 지혜자라면 어느 때에든지 아름다운 완성을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뻐하며 침착하게 인내할 필요가 있다(7:13~14).

 

다섯째 마당: 막돼먹은 세상이지만(전도서 7:15~8:8)

 

도전

세상과 인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무수한 인생들은 수많은 사건을 겪는다. 그 일과 사건들이 공의롭게 평가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파멸한다. 반면에 악인들은 그 악한 행위와 삶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한다(7:15). 막돼먹은 세상이다. 

 

반전

애초부터 뒤틀려진 해 아래 세상에서 당연한 결과이다. 이 세상에서 선함과 지혜에 틀림없는 포상이 따른다고 바라서는 안된다. 악행과 미련에 반드시 징벌이 주어진다고 바라서도 안 된다. 완전한 포상과 징벌에 대한 지나친 기대는 오히려 인생을 파멸하게 한다. 그 부조화를 감당할 수 없어 자폭하고 말 것이다(7:16~17).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지혜의 신자는 선을 행하는 삶과 악을 버리는 삶을 그저 묵묵히 살 뿐이다. 우리의 목적은 당장 이 세상에서 만사의 완전한 판결을 보는 것이 아니다!(7:18) 이 불공평한 해 아래 세상을 경건하게 살아가기 위한 절대적이고 강력한 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뿐이다. 

사실 사람들이 공평하다고 간주하는 인과응보의 법칙은 모든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해선 안 되는 기계적 법칙이다(7:19~22).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라는 이 천상의 지혜는 다만 인간적인 연구와 궁구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지혜다(7:23~24). 사실 상선벌악(賞善罰惡)과 인과응보라는 일반적 지혜는 사람을 미치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현실에서는 전혀 완전하게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왜곡된 이 세상에서 완전함을 기대하는 심리는 사망보다 더 쓴 아픔을 맛보게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영원에 잇댄 그분의 아름다운 역사를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라도 이 올무와 포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7:25~26, 26절에서 ‘여인’은 왜곡된 이 세상에서 인과응보 법칙의 완전한 작동을 기대하는 신념이다).

그러면 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영원에 잇대어 사는 삶이라는 지혜의 주소는 어디인가? 성령님의 감동을 입은 솔로몬이 이 지혜의 소유자로 찾은 단 한 사람은 ‘한 남자’(7:27~28, 아담 에핟)이다. 이 ‘한 남자’가 누구일까? 그는 곧 사람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시다.

본래 하나님을 경외하며 영생을 살도록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자 피곤하기 이를 데 없는 수많은 꾀들을 내었다(7:29).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영원에 잇대어 살아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접하는 것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삼위 하나님과 영생을 지닌 사람으로서, 이 하나님과 더불어서 현세를 영원에 잇대어 아름답게 완성해 간다는 믿음으로 사는 신자만 참다운 지혜자다. 그는 현실로 인하여 불만과 불신앙에 휩싸여 사납게 자폭하지 않는다. 고통으로 인하여 얼굴이 일그러지고 신음과 비명이 나올지라도, 그것이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천상의 광채가 발산되는 것을 아주 막을 수는 없다(8:1). 이 지혜가 사물의 참된 이치요,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 영원에 잇댄 이치,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섭리의 이치를 충분히 의지하고 살기에, 그는 현실이 다 납득되지 않을지라도, “정말 이따위로 하실 겁니까, 하나님?”을 외치는 불신앙적 사고나 언사나 행실을 더 이상 하지 않을 수 있다(8:2~4). 그는 미처 다 파악하거나 장악할 수 없는 온갖 일들을 임의로 하시는 이 왕의 전능, 전지, 그리고 선하심을 믿는 세계관을 가지고 산다. 그의 세계관은 더 이상 인과응보적 세계관이 아니다. 해 아래에서 인과응보적 법칙이 완전하게 작동되기를 바라는 신념은 인간을 괴롭히는 악이다(8:5~8). 

별도로 한 가지 덧붙일 내용이 있다. 전도자는 7장 28절 ‘...천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내가 찾았으나 이 모든 사람들 중에서 여자는 한 사람도 찾지 못하였느니라’는 말씀이 있다. 

영원에 잇댄 이치, 전능하고 전지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섭리의 이치를 깨달은 지혜를 소유한 사람은 천 명 중에 겨우 하나인데, 여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문법적으로만 본다면 아무리 겸양이나 과장법이라 하더라도 지나친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런 지혜를 여자는 절대로 가질 수 없고 오로지 남자만 가질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겸양일 수 없고 또 무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한 남자’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시다(고전 1:30, 2:6~7, 눅 11:49, 잠 8~9장, 사 11:2). 또한 하나님 경외의 지혜는 특수 신자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모든 신자가 향유해야 할 은혜다. 

그런데 이 은혜를 오직 ‘한 남자’에게서만 발견했다고 하니, 이것은 구원으로써 모든 신자가 지니게 될 은혜가 아니고 본유적 은혜다. 이 은혜를 본유적으로 소유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시다. 신자들은 우리의 지혜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 지혜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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