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 조망으로 세계를 보다

국내 기독교세계관 운동 결실 … 선교 대안으로 확장성 모색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원장:양승훈 박사, WIEW)이 창립 20주년을 맞아 7월 16일 한양대학교 동문회관에서 기념식을 가졌다.

이번 기념식에는 손봉호 이만열 김정욱 박사, 웨슬리웬트워쓰 선교사 등 기독교세계관운동 1세대들과 학교 관계자 및 후원자들이 참석해서 세계관대학원과 기독교세계관운동의 발전을 위해 마음을 모았다.

▲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이 창립 2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은 캐나다에 있으며 기독교세계관에 바탕한 학문연구와 각 영역에 적용을 전문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대학원은 1970년대의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 국내 기독지성인들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세계관운동의 가시적 결실 가운데 하나다.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은 말 그대로 기독교세계관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기 위해서 캐나다 밴쿠버에 1998년에 세워진 학교다. 트리니티웨스턴유니버시티 캠퍼스 안에 있으며 기독교세계관문학석사(MAWS)와 기독교세계관 디플로마(DWS), 기독교세계관 온라인과정 등을 교육하고 있다. 전임교수는 양승훈(세계관 및 과학), 전성민(세계관 및 성경주해), 박진경(가정사역 및 신학), 최종원(교회사 및 지성사) 등이며 폴 스티븐스(리젠트 칼리지), 로널드 사이더(이스턴 유니버시티), 김정욱(서울대), 이만열(숙명여대 명예), 안점식(아신대) 교수 등이 방문교수로 가르치고 있다.

지난 20년간 209명의 졸업생과 500여명의 수료생을 배출했으며 학위과정은 교육장소를 제공하고 있는 트리니티웨스턴유니버시티의 정규과정으로 등록되어 있다. 또 북미주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북미주신학교협의회(ATS)로부터 학위인정을 받고 있다. 기독교세계관이라는 주제 아래 해외에서 석학들로부터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학위과정 등록 및 수료자들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자체만 보면 한국인들이 주축이 되어 해외에서 운영하는 신학교의 하나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대학원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국내 기독교세계관 운동의 결실이며 오늘날에는 기독교세계관 운동을 전파하고 있는 중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상황, 세계관운동 시작

요즘은 기독교세계관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고 있지만 국내에서 이 단어가 처음 사용됐던 1980년대 초반에는 매우 생소했다. 기존에 불렸던 기독교신앙이란 단어를 대신해서 감히 신앙에 세계관이라는 칭호를 붙이므로 여타 철학이나 사상의 하나처럼 느껴지게 한다는 발상은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세계관운동이 시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1970년대의 암울한 사회상과 당시 사회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교회에 대한 기독지성들의 자성 때문이었다. 복음주의계열의 기독지성인들은 진보진영의 노선을 따라 시위나 노동운동을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당시 인권과 경제정의 문제를 마냥 도외시할 수도 없었다. 교회지도자들은 사회 문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교회성장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복음주의 기독지성들은 이러한 교회의 태도가 신앙과 행위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이원론 때문에 비롯됐다고 보고, 이를 극복하려면 기독교적 조망을 가지고 사회의 모든 문제를 생각하는 시각을 몸에 배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카이스트, 서울대를 비롯한 유수한 대학원생들과 젊은 교수들이 모임을 갖고 교회의 반성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론적 토대를 가깝게는 1974년 로잔언약에서 채택한 ‘사회적 책임론’과 로날드 사이더나 프란시스 쉐퍼의 사상에서 찾으려 했고 멀리는 네덜란드 정치인 아브라함 카이퍼와 16세기의 칼빈에서 가져왔다. 기독지성들은 제도권 교회 근처에서 한국교회가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모든 영역에서 대안을 제시하고 이끌어가야 한다고 소리높였다.

세계관운동을 시작한 이들은 1981년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 1984년 기독교학문연구회를 만들었다. 또 1987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1989년 <낮은 울타리>, 1990년 한국라브리, 1993년 직장사역연구소 등이 연이어 생겼다.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절박감을 공감대로 하여 봇물 터지듯 모임이 시작됐다. 급기야 기독교세계관의 확산과 지속은 인재 양성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1997년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는 당시 경북대 교수였던 양승훈 박사를 캐나다로 파송해 기독교세계관대학원을 설립토록 했다. 2009년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와 기독교학문연구회는 (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로 통합했으며 이 동역회는 밴쿠버세계관대학원과 더불어 현재 기독교세계관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또 이들 기관들에 의해 배출된 졸업생과 회원들이 세계관 교육 및 연구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다수 운영하고 있다.

운동의 최고 결실, 기독교세계관대학원

기독교세계관운동은 여타 파라처치처럼 교회와 거리를 두지 않았다. 주일에 별도의 모임을 갖지 않았고 단체의 성장을 위해 강한 결속력을 회원들에게 요구하지 않았다. 교회의 자성을 촉구하는 입장이었기에 교회로부터 친근함을 얻는데에도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교회 밖 운동이 가지는 조직력과 재정적 한계를 항상 체감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교회성장의 세례 속에 탄생한 대형교회들은 차츰 기독교세계관운동이나 파라처치 프로그램에 눈을 돌려 교회 내에서 소화했다. 이 때문에 기독교세계관운동은 존재했지만 한국교회 전체에 큰 영향력을 끼치기에는 한계를 체감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최근에 와서는 세계관 운동 관계자들이 보수정권에 친화적인 입장을 취해왔다는 자성이 일어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깊은 상황이다. 또 과연 기독교세계관운동이 시작된 지 38년이 지났지만 여전한 한국교회의 이원론적 행태를 보면서 그 방향성을 재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세계관운동은 기존 교회의 교육이나 선교단체의 제자훈련식 교육에 만족할 수 없었던 청장년층을 흡수해왔다는 점에서 계속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또 사회의 제반 영역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혐오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기독교적 시각을 제시하는 일은 포스트모던시대와 제4차산업혁명시대에 교회 선교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교회의 관심과 후원이 필요하다.

여전한 교회내 이원론 타파 과제

양승훈 박사는 “그동안 한국 세계관운동의 가장 큰 약점은 세계관 운동이 소수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학문운동으로 축소되었던 것”이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수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바른 성경해석과 신학적 관점이 무엇인지 분별토록 하기 위해 기독교세계관운동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양희송 대표(청어람)는 “2000년대 이후 새로운 젊은 세대의 유입은 거의 일어나지 않고, 교회나 선교단체 등에서 세계관 공부의 흐름은 대중적으로 거의 끊어졌고 학술적으로 정체 상태”라면서 “향후 세계관운동은 대학 뿐만 아니라 대학과 연구소의 연구자, 시민사회 운동가들과 결합하여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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