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필 목사의 포토에세이] (13)

복음송 가운데 이런 가사가 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점심 준비를 위해 우물에 물 길러 온 것을 왜 헛되다 하는가? 그것은 이 세상의 삶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유대인의 금기인 사마리아로 들어가셨고, 수가성 야곱의 우물에서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해 12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사오라며 몽땅 동네로 보내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을 거신다. “나에게 물 좀 달라.” 여인은 반문한다. “유대인으로서 어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 다시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만일 네게 물 달라 하는 이가 누군 줄 알았더라면 그에게 구했을 것이고, 그러면 그가 네게 생수를 주었겠지.” 여인이 또 반문한다. “당신은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떻게 나에게 물을 줄 수 있지요? 당신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큽니까?”

“이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르나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니, 이유인 즉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라는 말에 여인은 귀가 번쩍 뜨인다. “주여, 나에게 그 물을 마시게 하여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이곳에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소서.”

그런데 예수께서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던진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 “나는 남편이 없답니다.”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던 예수께서는 “그래 네 말이 옳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맞구나.” “아이고, 주여.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이시군요.”(요한복음4:3~34)

남편 여섯을 둔 이 여인의 이야기는 바로 지금의 내 모습이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물으신다.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남편’이 얼마나 많은지를. 과연 우리의 진정한 남편은 누구일까? 그리고 우리는 그 남편을 맞이할 만큼, 순전한 처녀로 살고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정한 ‘남편’을 만나지 않는 이상, 우리들 또한 수가성 여인처럼 아무리 많은 ‘남편’을 가지더라도 결코 갈증과 목마름에서 해갈되지 않는다.

그녀가 예수와의 영적 ‘만남’(크노시코: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한 후 다시는 야곱의 우물가로 나오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를 마시지 않고서는 끝없이 다른 야곱의 우물가를 서성거릴 수밖에 없다.

“오늘 우리는 누구와 동행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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