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성장 이데올로기와 성공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 세상은 항상 성장을 추구하며 이 성장에 기여한 사람을 성공한 사람으로 환대한다. 지난날 한국교회도 교회 성장의 신학과 목회전략에 사로잡혀 총동원전도주일이 20세기말을 풍미했다. 이런 과정에서 목양보다는 경영에 신경을 쓰면서 세속적이고 성공지향적인 경영의 원리를 교회에 도입하여, 여기에 휩쓸린 교회는 언제부터인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기능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런 모습에 교회공동체는 리더로서의 가치를 상실했고 사회가 던지는 비난 속에서 침몰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과정의 윤리와 성실을 추구하지 못한 채 참 목자상을 상실하면서 인격 목회와 목회자의 권위를 상실했다. 이 땅위에 복음의 본체로서 오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는 다른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권세 있는 새 교훈을 말하셨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 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라”(행 10:38)

예수님은 직분자체에만 의존하는 형식적이고 제도적인 권위가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영적 권위를 나타내셨다. 진정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나타나는 지도력이 예수님의 리더십이었다. 성령의 카리스마 즉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은 민주적 합의 과정과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진정한 성령의 인도하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 공동체로 하여금 영적 리더십 앞에 성도들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게 만들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안디옥교회의 모습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게 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의 확고한 부르심이 있었지만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공동체에 강요하지 않았다. 리더십은 자신의 개인적 영적체험을 교회 공동체에 무리하게 강요하는 독선과 아집의 지도력이 아니다. 교회라는 주님의 몸을 통하여 공동체적 확신으로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것이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이 영적으로 가장 민감하게 고양되어 있는 금식기간에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는 명령을 공동체적으로 드러냈다.

지도자는 언제나 지도력 행사를 할 때 분명한 영적 카리스마와 확신을 갖고 있었지만 공동체화라는 과정을 하나님의 인도 아래 받아 나갔던 것이다. 이런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들이 총회 일꾼으로 세워지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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