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도르트신경 400주년 ② 도르트 회의 개회 배경과 진행 과정

1. 회의의 소집 목적

▲ 김요셉 교수
(총신대 역사신학)

“개혁교회의 모든 신학자들의 공통적인 판단을 따라 알미니우스와 그의 분파들의 교리들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정확하게 판단 받게 함으로써, 참된 교리를 견고하게 하고 거짓 교리는 부인하여 하나님의 복주심에 의해 일치와 화평과 평온을 네덜란드 교회 안에 회복되게 하려 한다.”

이처럼 도르트 신조(Canons of Dort)의 서문은 도르트 회의의 목적을 세 가지로 밝힌다. 첫째, 알미니우스주의와 관련한 교리적 문제의 해결이었다. 둘째, 교리적 문제를 여러 국가 개혁 신학자들의 공동 검토를 통해 판단하기 위함이었다. 셋째, 궁극적으로 네덜란드 교회의 일치와 화평의 회복을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도르트 회의의 소집 과정 및 전개 과정, 그리고 이후의 처리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회의가 다루었던 알미니우스주의의 내용과 더불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적 수준의 회의가 소집되어야만 했던 당시 네덜란드의 정치적 상황까지 살필 필요가 있다.

2. 정치적 상황

도르트 회의 소집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배경은 당시 네덜란드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실로부터 독립을 얻기 위한 전쟁 중이었다는 점이다. 라인강 하구 저지대 지방의 통치권을 가지고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 필립 2세는 이 지역의 독립 움직임을 진압하기 위해 1567년 알바 공작(Don Fernando Albarez de Toledo, 1507~1582)을 파견했다. 알바의 군사적 진압에 맞서 홀란드 주를 중심으로 한 저지대 지방의 북부 주들은 1572년 빌럼(Willem van Oranje, 1533~1584)을 새로운 집권자로 추대하며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 독립 세력은 합스부르크의 친 로마가톨릭 경향에 대항해 개혁신학을 새로운 종교적 대안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독립전쟁이라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이들 지역이 개혁신학을 수용했다는 사실은 이후 개혁신학이 수용되는 과정에서 많은 갈등과 논쟁이 발생할 것을 예고했다.

1609년 체결된 휴전협정으로 12년 간 지속된 평화 기간 동안 네덜란드 독립 주 내에는 온건파와 강경파의 정치적 대립이 심화되었다. 홀란드 주의 행정장관인 올던바르너펠트(Johan van Oldenbarnevelt, 1547~1619)는 온건파를 대표했다. 그는 북부 주들만의 독립과 각 주의 자치를 강조하는 지역주의를 내세웠고 외교적으로는 스페인과의 대화를 추구했다. 온건파는 종교적으로는 다양한 입장을 존중하는 유연한 입장을 취했다.

반면 아버지 빌럼의 뒤를 이어 총사령관(Stadhouder)이 된 마우리츠(Maurits of Oranje, 1567~1625)는 강경파를 대표하여 저지대 지방 전체의 독립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중앙집권주의를 주장했으며 외교적으로는 합스부르크에 반대하는 잉글랜드를 필두로 한 여러 국가들과의 연대를 모색했다. 종교적으로 마우리츠와 강경파는 남부 주들을 포함한 저지대 지방 전체의 독립을 위해 엄격한 칼빈주의의 확립을 선호했다. 17세기 초 알미니우스와 고마루스의 논쟁으로 인해 레이든 대학과 홀란드 지역에서 발생한 신학적 논쟁은 12년 휴전 시기의 정치적 상황에 휩쓸려 심각한 정치적, 외교적 문제로 확대되었다.

3. 전국적 회의 소집의 필요성

알미니우스가 1609년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정론 주장과 관련한 신학 논쟁은 네덜란드 개혁교회 전체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상황으로 확대되었다. 홀란드 주의 개혁교회가 알미니우스의 예정론을 따르는 목사들의 설교를 금지하고 제재하자, 이들이 세속 집권자들에게 보호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에피스코피우스(Simon Episcopius, 1583~1643)와 아이텐보게르트(Jan Uytenbogaert, 1557~1644)를 대표로 한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1610년 하우다(Gouda)에 모여 46명 목회자의 서명으로 홀란드와 서프리슬란트 의회에 ‘항의서’(Remonstrance)를 제출했다. ‘항의서’는 우선 네덜란드 교회의 표준 문서들을 개정해 줄 것을 요구했고, 본문에서 수정이 필요한 핵심적 사항들을 이른바 ‘알미니우스 5대 신조’로 정리해 제시했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발생한 문제를 정치적 사안으로 만들고 말았다.

이 항의서로 인해 발생한 분란을 해결하기 위해 홀란드 정부가 1611년 소집한 ‘헤이그 회합’(collatio Hagiensis)에서 항론파 대표 여섯 명과 이에 반대하는 칼빈주의 대표자 여섯 명이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이 회합은 항론파의 신학적 오류를 지적하고 칼빈주의적인 예정론을 정교하게 표현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호미우스(Festus Hommius, 1576~1642)가 주도해 작성한 ‘반항의서’(Counter-Remonstrance)가 발표되었고 이들 ‘반항의론파’(Counter-Remonstrants)의 신학적 입장은 1613년 델프트에서 열린 회의에서 재확인 받았다. 반항론파는 더 나아가 이 논란의 해결을 위해 국가적 차원의 교회 회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했던 홀란드 주의 많은 귀족들과 상공업자들은 종교 문제로 인해 발생한 분쟁을 조속히 종결시키고 종교의 자유를 확보해서 스페인 등을 상대로 한 교역에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려 한 온건파 지도자 올던바르너펠트는 신학적 논쟁이 강경파의 득세로 연결되는 사태를 방지하려 했다. 그는 1610년 홀란드 주 내에서 종교 논쟁을 금지했고 1614년에는 모든 홀란드 주민들에게 자유로운 신앙 활동을 보장한다는 의회의 결정을 이끌어 냈다. 이에 맞서 강경파 지도자 마우리츠는 1617년 9월 29일 연방 의회의 표결을 통해 전국적인 교회 회의(National Synod)를 소집을 명령했다. 이 교회 회의의 목적은 1610년 항론파의 ‘항의서’에 나타난 다섯 가지 핵심적인 신학적 주장들을 검토하여 항론파의 입장이 개혁파 신학의 범위에 속할 수 있는지 판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올던바르터펠트는 이 명령에 반발해 1618년 위협을 당하고 있는 항론파 목회자들과 교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각 도시 의회들이 임의로 ‘자위대’(waardgelders)를 징집할 것을 독려했다. 강경파의 입장에서 볼 때 각 주에서 자위대가 소집되는 일은 반란 행위였다. 이에 마우리츠는 사촌 루이를 설득해 홀란드와 우트레히트로 군사를 보내 자위대를 진압하고 1618년 8월 28일 올던바르너펠트와 그로티우스 등 네 명의 온건파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연방 각 주에서 다시 투표를 실시해 전국적 교회 회의 개최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4. 회의의 시작과 진행 과정

이와 같은 정치적 투쟁의 과정을 거쳐 1618년 11월 13일 홀란드 주 도르트레히트 시에서 1586년 이후에는 소집되지 못했던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의 전국적 총회가 32년 만에 다시 열렸다. 마우리츠는 자신의 보호와 관리 하에서 전국적 교회 회의의 소집과 진행을 도왔지만 구체적인 신학적 논쟁점에 대해서나 개혁교회의 제도 정비와 관련한 논의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 이는 신학적, 교회 제도적 문제는 국가가 간섭할 사안이 아니라 교회의 고유한 권한에 속한 것이라고 본 칼빈주의자들의 국가와 교회 관계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따랐기 때문이다.

도르트 회의에 참여한 반항론파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불필요한 논쟁들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항의서에 진술된 항론파들의 다섯 가지 신학적 주장을 검토하는 데 집중했다. 또 이 모든 과정이 불합리한 정치적 합의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고 신학적 합의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네덜란드 각 주의 개혁교회 대표자들뿐 아니라 독일과 스위스의 개혁교회 대표자들과 잉글랜드 국교회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대표자들을 초청했다. 다만 루이 13세의 위협으로 인해 초청받은 프랑스 개혁교회 대표들은 참석할 수 없었다. 도르트 회의는 프랑스 개혁교회를 존중해 이들의 자리를 비워둔 채 개회했다.

도르트 회의는 공정성을 기해 13명의 항론파 대표들도 회의에 참석해 자신들의 신학적 견해를 상세히 해명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항론파들은 이 회의가 자신들의 의견을 청취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자신들의 주장을 판별하기 위한 자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에피스코피우스를 대표로 회의에 참석한 항론파는 처음부터 국가가 명령해 소집된 회의의 부당함을 강변했다. 항론파들이 자신들 교리적 입장을 제시하지 않고 회의의 진행을 고의적으로 방해하자 1619년 1월 14일 57차 회의에서 의장 보거만(Johannes Bogerman, 1576~1637)이 참석한 이들의 동의를 얻어 항론파 대표자들을 회의에서 퇴장시켰다.

회의는 이후 이듬해 1619년 5월 9일까지 총 154 차례의 회의를 거쳐 항론서에 나타난 알미니우스주의의 신학적 주장들을 검토했다. 그 결과 논란이 된 교리에 대한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입장을 확립한 도르트 신조가 작성되었다. 도르트 회의는 이와 더불어 원어 성경에서 직접 번역한 공인 네덜란드어 성경 번역 작업을 결의했고 이 결의에 따라 번역 사업이 진행되어 국가공인성경(Statenvertaling)이 1637년 출판되었다.

회의 이후 5월 20일 항론파 목회자들의 목회 활동과 출판 활동이 금지되었으며 7월에는 국가 총회에서 이들의 활동을 금지하는 금지령이 통과되었고 이 법령에 동의하지 않은 항론파 목회자들은 공적 평화를 훼손했다는 죄목으로 네덜란드 연합에서 추방당했다. 도르트 회의는 초지일관 신학적이며 교회적이었다. 그러나 회의 이후 정치적 대응도 뒤따랐다. 1618년 8월부터 구금상태에 있었던 올던바르너펠트는 회의 파회 직후인 1619년 5월 13일 교회와 국가에 대한 반역 죄목으로 참수 당했다. 그의 정치적 동지 그로티우스는 종신 징역형을 선고 받았지만 이후 탈출해 국제법 연구를 비롯한 정치적 활동을 계속했다. 추방당한 알미니우스주의 목회자들은 이후에도 네덜란드 여러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18세기에는 다시 돌아와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5. 도르트 회의의 의의

이처럼 도르트 회의는 17세기 초 독립 전쟁 중에 있었던 네덜란드의 급박한 정치적 상황에서 소집되고 진행되었다. 이 때 신앙고백서들의 권위에 대한 논의, 칼빈주의 예정론과 관련한 알미니우스주의의 이견에 대한 검토,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 설정 등의 문제는 모두 새로 독립한 네덜란드 연합 공화국이 국가 교회로서 개혁주의 교회를 채택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했던 중요한 종교적 문제들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도르트 회의와 신조가 보여준 신앙적 가치는 여전히 중요한 보편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려 한 신학적 목적, 바른 신앙고백을 확립하고 모든 교회가 공유함으로써 참된 교회의 일치를 지키려 한 교회론적 관점, 그리고 그리스도의 주권을 구현하기 위해 국가를 비롯한 사회 구조 속에서 교회를 신앙고백의 공동체로서 확립하려 했던 실천적 시도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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