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민 목사의 상도동 이야기]

상도동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에 속해있다. 1936년에 서울시로 편입이 되었다. 1943년에는 영등포구, 1973년에 관악구에 소속되었다가 1980년에 이르러 동작구 상도동으로 확정되었다. 이 복잡다단한 변화과정을 한 자리에서 묵묵히 지켜본 증인이 있으니 바로 이화약국이다.

이화약국은 지금으로부터 75년 전에 세워졌다. 요즘에는 약국이 많기에 새로 약국 하나 문 열어도 별 관심을 얻지 못하지만, 그 당시에는 약국 하나가 세워지면 오늘날 대형 병원 하나가 생기는 만큼이나 전 국민의 관심을 받았다.

그런데 ‘이화약국’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이화약국의 창업자는 정광훈 약사이고, 이화라는 이름을 쓴 이유는 본인이 그 당시 일본 이화제약회사에 다니다 창업했기에 ‘이화’라는 이름을 가져온 것이라 한다. 이화(梨花)가 아닌 이화(理化)이다

이화약국은 피부전문 약국으로 출발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창업주가 다닌 이화제약이 바로 피부치료제를 전문적으로 만든 회사였고, 당시는 국민들 대다수가 갖가지 피부병을 앓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박이 났다.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이화약국의 연고를 바르면 무조건 낫는다는 말이 돌았다. 약이 정말 귀했던 당시에 정광훈 약사의 연고비법은 입소문을 탔다.

▲ 이화약국의 상징 조가비가 새겨진 연고통.

사람들은 수없이 찾아오고, 연고를 처방해 전달해주어야 하는데 그때는 플라스틱 통 자체가 귀한 시대였다. 연고를 담을 통이 없었다. 생각해 낸 지혜가 바닷가에 흔하고 흔한 조가비를 가져다가 거기에 연고를 담아주는 것이었다. 조가비 양쪽을 열고 연고를 담아 누르면 기가 막힌 연고 통이 되었다. 약국에 다녀오는 사람들마다 조가비를 들고 나오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렇게 조가비는 이화약국의 심벌이 되었다.

창업자인 아들인 정지건 장로(상도교회 원로)가 유한양행에서 근무하다가 아버지의 유업을 물려받았다. 시대도 바뀌고 사람도 바뀌어서 새롭게 한다고 연고 담는 통을 만들었는데 고객들은 그게 아니라며 조가비를 달라고 하니 막막했다. 그래서 초록색 연고통 위에 조가비를 그려 넣었다. 이 연고통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고, 이제는 조가비가 그려진 초록색 연고 통이 이화약국의 상징이 되었다. 의약분업 전에는 고객이 하루에 1500명씩 전국에서 찾아왔고, 그들의 손에 초록색 물결이 일렁였다고 한다.

정 장로님이 주일에 교회 가는데도 사람들은 약국 앞에 줄을 서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상도교회를 세우신 분이신데, ‘너 주일날은 예배드리는 날이고 돈 받는 날 아니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주일에는 무료로 연고를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화약국에 들어가면 오른쪽 벽에 예수님이 양들을 안고 계신 대형 그림이 걸려있다. 같은 건물의 이화사랑피부과에 가도 왼쪽 벽면에 ‘사람은 치료하되 고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는 글귀가 선명히 붙어있다.

의료사업을 하는 건지 의료선교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할머니가 세운 교회에서 할머니가 가르쳐 주셨던 신앙의 모습대로 사시는 정 장로님의 모습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것처럼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의 거짓 없는 믿음’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게 참 감사한 일이다.

지금도 정 장로님은 이화약국의 약사로 근무하시고 올해부터는 기독교세진회 제14대 이사장으로 섬기고 있다고 한다.

세진회는 담 안에 갇힌 자들을 섬기는 단체다. 사람들이 왜 그런 자들을 도와야 하냐고 물을 때 곤란한 적도 있었지만, 기도하는 중에 이런 노래가 떠올랐다고 한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네, 구세주의 사랑이야기.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주님의 그 사랑은 놀랍네 놀랍네! 나를 위한 그 사랑.’ 올해 12월 4일에는 사랑의교회에서 세진회 정기음악회가 열린다. 매년 개최하는 음악회지만 아름다운 감동이 해마다 증폭된다고 한다.

이제 이화약국은 이화사랑피부과로, 이화한의원으로 그리고 이화치과로 점점 지경을 넓히고 있다. 지경이 넓혀진 만큼 지역과 국경을 초월한 이화의 아름다운 두 번째 이야기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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