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나를 오라 하네, 대동강의 십자가

일본법대 졸업한 엘리트, 신사참배 거부로 옥사한 양용근 목사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양향모 저/ 쿰란출판사)


<예수 나를 오라 하네>는 전라남도 구례읍교회를 시무했던 양용근 목사의 이야기다. 양 목사는 순교자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삶과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모습은 여느 유명인에 비해 조금도 못하지 않다.

양용근 목사는 1905년 전라남도 광양에서 태어나 순천매산학교 재학 중 형(양용이)의 전도로 신앙에 입문했다. 양 목사는 형의 권유에 따라 매산학교를 중퇴하고 일본 유학을 떠나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는 조선 사람들이 일본의 횡포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그들을 변호하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 법학과를 지원했다.

그러나 주경야독의 고생을 하면서 공부하던 양 목사의 꿈은 뜻하지 않는 재난으로 물거품이 될 뻔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일본 자경단에 붙잡히게 된 것이었다. 수많은 조선인들은 어이없게도 관동대지진의 주범으로 몰려 비참하게 학살당했다. 양 목사를 결박한 자경단원들은 수많은 조선인들을 새끼줄에 매어 억지로 땅에 눕힌채 일본도로 조선인들의 목을 차례로 찔러 죽였다.

양 목사의 차례가 다가왔을 때였다. 갑자기 말을 탄 사람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 “사형을 중지하라, 상부의 엄명이다.”라는 명령을 내리고 사라졌다. 그의 명령에 사형은 중지되었고 조선인들은 인근 경찰서로 연행됐다. 그러나 놀랍게도 경찰서에서 들은 얘기는 어디서고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는 말이었다.

양 목사는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뒤 일본대학교 법률과를 졸업했고 귀국하여 형이 세웠던 영명학당을 운영하는 일에 힘을 썼다. 양 목사는 학교 운영에 있어서 일본의 방침을 어기고 주간에 아동에게도 교육을 시키고 일본어가 아닌 한국어를 가르쳤다. 이때부터 일제는 양 목사를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찍고 감시하기 시작했다.

교육 사업을 하던 중 양 목사는 백성들에게 지식과 품성을 가르쳐 주는 것도 귀하지만 목사가 되어 영혼을 구원받게 하는 일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으며 전라도에서 평양까지 다니면서 학업에 힘써 1934년 제34회로 졸업을 하게 됐다. 목사 안수를 받기 전부터 광양읍교회, 신풍리교회(애양원교회)에서 조사 직분으로 사역을 했고, 목사가 된 후 길두교회와 구례읍교회에서 시무했다. 그는 일제에 주목을 받는 몸이었으며 그 때문에 신변의 위협을 느꼈으나 올곧게 말씀을 전했고 신사참배와 궁성요배에 반대했다.

양 목사는 1940년 일제의 불법적인 구속으로, 순천노회 시무 목사 전도사 14인과 함께 구속되었고 감옥에서도 일제에 굴하지 않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순교했다.

저자 양용근 목사는 “믿음을 알고, 진실하게 고백하고, 지키기 위해서 순교하신 양용의 목사의 삶은 가슴 저리도록 소중한 것이었다”고 집필 동기를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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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목사와 동역 … 공산 치하에서 순교한 유계준 장로

<대동강의 십자가>
(김호민 저/ 쿰란출판사)

평양산정현교회가 배출한 위대한 신앙인인 유계준 장로의 생애와 사상을 담았다.

유계준 장로는 1879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평양산정교회 장로로 시무하면서 순교자 주기철 목사를 도와 신앙투쟁을 벌였다.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거절했으며 해방 후에도 북한에 남아서 조만식 장로와 함께 건국 사업을 펼쳤다. 그는 1950년 6.25 전쟁을 하루 앞두고 공산당에게 연행되었으며 그로부터 3개월 후 순교당했다.

유 장로는 척외사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으나 1905년 마포삼열 선교사와 한석진 목사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됐다. 그는 예수를 영접하고 상투를 자르고 단발을 감행했으며 자신의 집을 드려 미림교회를 설립했다. 소규모 시탄사업에 성공하여 부를 이루었으며 산정현교회를 출석하면서 봉사했다.

유 장로는 1938년 교단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주기철 목사와 더불어 순교신앙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그는 공산치하 때에는 일요선거반대, 김일성 초상화 게시 반대, 조선기독교도연맹 거부 운동을 전개했다.

민족주의운동과 애국위민사상을 위해서도 열심을 내어 상해임시정부의 연통제 간부 역할을 하면서 독립운동자금조달,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신문 반포, 독립투사 지원과 도피처 제공을 마다하지 않았다.

교육사업, 문화운동, 구제사업을 했으며 특히 평양숭덕학교 재단이사장을 맡았다. 물산장려운동에도 참여했으며 양로원을 설립하여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 특히 양로원은 단순한 무의탁자들의 쉼터 만이 아니라 독립투사들의 가족을 돌보는 민족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다.

해방이 된 후 남하하지 않았으며 평생을 지켜온 산정현교회와 함께 신앙운동을 전개하다가 순교했다. 이 책은 산정현교회 담임 김호민 목사가 지었으며 유계준 장로 뿐만 아니라 신앙과 사회적인 면에서 성공한 그의 자녀들의 전기도 담았다.

저자 김호민 목사는 “유계준 장로는 생전에 ‘의로운 정신은 언제나 생사를 초월했고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라고 했다”면서 “유 장로는 하나님의 교회인 산정현교회와 북한 동포를 위해 생사를 초월했던 사람”이라고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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