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훈 교수(성결대)

▲ 윤영훈 교수(성결대)

한국인들은 열심히 일하고 근검절약하는 것을 토대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한국교회 부흥 역시 한국 산업화의 동반자로 정서적 공유를 이루어 왔다. 더 나아가 청교도적 가치는 개인의 욕망이나 유희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신학 해석을 통해 놀이와 신앙은 서로 상반된 가치로 여겨졌다. 하지만 일과 개인적 삶의 밸런스를 중시하는 ‘워라밸’ 시대를 맞아 한국 사회는 많은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여가를 중시하는 사회 속에 사람들은 교회를 멀리하고 세속문화에 심취하여 될 것이란 잠재적 염려를 표명하는 분들도 많다. 이런 문화적 환경 속에 교회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산업화 시대에는 이상적 인간의 비유로 ‘개미’와 같은 삶을 모델로 삼았다. 놀기 좋아하는 ‘베짱이’는 늘 무익한 인간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젊은이들은 개미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렇다고 베짱이가 이상적 모델은 아니다. 옛날 베짱이는 돈 없이도 낭만과 유희를 즐길 수 있었지만 21세기 베짱이들은 돈 없이 놀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들은 모두 개미 사장 밑에서 알바생으로 전락해 있다. 오늘의 이상적 인간 모델로 부상한 곤충은 바로 ‘거미’이다. 거미는 직접적인 노동보다는 일종의 시스템을 구축하고 일과 휴식의 효율과 조화 속에 산다.

요한 호이징어는 자신의 책 <호모 루덴스>(1944)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 생각하는 것보다 더 근원적 본성은 놀이이다. 결국 모든 인간 행동의 동기는 즐거움을 위한 것 아닐까?” 최고의 놀이는 무엇인가에 자발적으로 열중하며 순수한 즐거움으로 하는 활동이다. 이런 의미에서 놀이는 창의성의 원천이다. 구글(Google)의 본사가 사원들에게 일터가 아닌 놀이터가 되도록 만든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들은 창조성이 놀이에서 나온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재미는 오늘의 경제활동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위르겐 몰트만은 <놀이의 신학>에서 기독교신학이 ‘미학적 즐거움’(aesthetic joy)의 가치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 시대의 흐름을 넘어, 이제 한국교회도 성경의 본질에 근거해 신학과 사역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꿈꾸신 창조세계는 안식일의 영원한 축제이며, 하나님과 함께 자연과 더불어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고 흉보지 않는 온전한 인간관계를 누리는 흥겨운 에덴의 놀이터였다. 이 창조 세계 안에서 노동은 함께 동역하며 나누는 놀이의 연장이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이상적 모습으로 ‘훈련’과 ‘사역’을 강조하였다. 이 두 단어가 오늘날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얼마나 살벌한 용어였는지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세속적 놀이 문화에는 죄악과 방탕의 어두운 문물로 가득하다. 이에 대한 우리들의 시대적 사명은 재미를 넘어 삶의 의미와 진정한 희락을 제공하는 새로운 놀이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불행히도 어려운 시대를 지나온 우리 시대의 중년 남성들은 생산성을 높이는 목표지향적인 삶을 살면서 혼자서든 함께이든 건강하게 노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버지가 놀 줄 알아야 가족이 화목하다. 사장님이 놀아야 직원들이 즐겁다. 마찬가지로 목사님이 좀 놀 줄(?) 아셔야 교인들도 행복해지지 않을까?

돌이켜보면 내 기억 속에 교회는 즐거운 놀이로 충만했다. 시편은 이상적인 예배의 모습으로 “주의 자녀들이 주의 전에서 즐거이 뛰어 논다”고 표현한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나는 교회가 즐거운 웃음소리가 가득한 성소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것이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천국의 진짜 모형일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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