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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총회를 견인할 힘을 가진 일꾼이 필요하다김관선 목사(산정현교회)
▲ 김관선 목사(산정현교회)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 들러 리빙스턴 선교사 등을 만나면서 이 글을 쓴다. 셰익스피어, 헨델을 비롯하여 정치인과 유명 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모든 곳을 들러보고 난 후 무엇보다 입구에 들어서면서 보았던 묘비가 다시 가슴에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입구에 들어서면 제일 앞에 윈스턴 처칠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지나자마자 꽃으로 장식된, 공식적 설명으로도 ‘누구도 밟지 않은 묘비’가 나온다. 웨스트민스터의 모든 묘비는 바닥에 깔려 있기에 리빙스턴 등 모든 묘비를 아무렇지 않게 밟고 다닌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누구도 밟지 못하게 꽃으로 둘러싸여 있다. 무명용사의 묘비다.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누군지 알 수 없는 용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민에게 ‘피와 땀과 눈물’을 요구하던 처칠 수상의 묘비 바로 뒤에 놓인 이 무명용사, 이렇게 존중받고 있다. 이름이 알려져야만 성공한 것은 아닌 듯 싶다. 이 젊은이의 죽음은 영국민의 존중의 대상이듯 그리스도인이 자기 이름도 드러내지 않은 채 건강한 삶의 흔적을 남긴다면 최고의 신앙인이 될 것이다. 

어느덧 103회 총회가 3개월 앞으로 다가 왔다. 이에 따라 임원으로 출사표를 던진 인사들의 면모가 드러나고 있다.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섬기고 싶고 또 섬길 수 있는 일꾼이 자리에 앉아야 한다. 섬기고 싶지만 힘이 없거나, 힘은 있으나 섬길 생각이 없는 인사는 나서지 않아야 한다. 임원이 되는 것을 개인의 명예나 가문의 영광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는다면 심히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귀한 자리에 천박한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여긴다면 모두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한 무명용사처럼 묵묵히 자기를 드러내지 않은 채 섬기는 일꾼이 필요하다.

단호히 말한다면 섬길 수 있는 힘을 가진 일꾼이 필요하다. 도대체 무엇이 그런 힘일까? 재력, 교세, 조직 등일까? 단언하건데 그 ‘힘’이란 결코 그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군림하거나 또 욕심만 드러내는 경우를 많아 보아왔다.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투자(?)한 것을 보상받고 싶은 양 욕심을 내는 인물들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힘’이란 개인의 욕망을 뛰어넘는 성경적 가치관이요 건강한 의식이다. 진정한 섬김이 가능한 것이고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소유하신 주님께서 오직 섬김의 흔적만 남기셨다. 목숨까지도 섬김을 위해 내어놓으셨다. 그럴 각오를 하는 분들이 자리에 앉아야 건강한 교단이요, 교회를 이끌 수 있다. 물론 겉으로는 섬긴다는 명분으로 포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결코 속일 수는 없다. 곧 그 의식의 바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누가 이 길을 갈 수 있을까? 선택권을 가진 총대들은 정신 차리고 살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한 채 친소관계나 이해관계에 따라 그 선택권을 행사한다면 우리 교단에 엄청난 손해를 끼칠 것이다. 추억하기도 싫은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총회를 위해 섬긴다는 인사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많아 지켜보아야 했다. 교단을 대표하는 주요인사가 온갖 구설수에 휘말리거나 그로 인해 총회를 비상사태에 빠지게도 했다. 그런 상황으로 인해 아까운 시간만 보내고 총회는 하릴없이 소모적인 운영만 했던 것을 기억한다. 성도들의 눈물겨운 헌금으로 운영되는 총회가 창조적인 기능과 미래지향적 사역을 멈춰버린 것은 하나님 앞에서 통회해야 할 죄라고 말하고 싶다.

더욱이 지금 한국교회는 비상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총회는 더욱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사역이 필요하다. 그렇게 견인할 힘을 가진 사람들이 나서야 한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구조나 경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누가 어떤 사람이 일하느냐가 관건이다. 건강한 가치관과 헌신된 자세를 겸비한 인물이 필요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사람이 문제다. 좋은 사람, 섬김의 의식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창조적인 의식과 진취적인 자세로 미래를 향해 교단을 견인할 일꾼을 기대한다. 제발 자리에 욕심을 가진 인사들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 지금까지 살아왔거나 누린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기를 원하고 또 교단의 전면에 서기를 원하는 인사들은 죽을 각오로 십자가 즉 사명을 감당하며 섬겨야 한다.

이제 우리는 그런 인물의 등장을 기대하기보다 만들어내는 것도 필요하리라 판단된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 가치관과 능력을 갖춘 인사들은 자꾸 숨어 버린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부디 좋은 분들이 희생하는 마음으로 등장하기를 기대하며 그런 인사들을 알아봐줄 뿐 아니라 등 떠밀어서라도 일하게 해주는 총대들의 안목과 협력도 요구된다. 이 글이 누군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면 교단을 염려하는 순수한 마음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기독신문 ekd@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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