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민 목사의 상도동 이야기]

상도동 주민들에게는 참 뜻 깊은 일이다. ‘양녕대군 묘역’이 시민 휴식·문화·교육공간으로 2018년 4월 26일에 전면 무료 개방했다.

▲ 상도동에는 태종의 세자이며 세종대왕의 형이었던 양녕대군의 묘역이 있다. 묘역 돌비에 쓰인 ‘숭례문’이란 글자는 양녕대군의 친필이다.

지하철 7호선 상도역에서 국사봉 터널 쪽으로 가다보면 굳게 닫힌 문 하나를 만나게 된다. 조선 태종(이방원)의 맏아들인 양녕대군(1394∼1462)의 묘역(서울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11호) 지덕사의 출입문이다. 서울시와 상도동의 대표적인 역사·문화자원이지만 2000년 이후 문화재 관리 차원에서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오다, 18년 만에 다시 문을 연 것이다.

양녕대군이 누구인가? 태종의 세자였으며, 효령대군과 충녕대군의 형이다. 원래 자기 위로 형이 셋 있었지만 모두 죽어 맏이가 됐다.

여기서 잠시 ‘충녕대군’이라는 존재를 주목해보자. 이름이 조금 생소할 수 있겠지만 바로 광화문 중심에 인자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세종대왕이다.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백성들에게 글을 깨우쳐 주었고, 집현전을 활용하여 인재등용의 길을 확대했으며, 4군과 6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방위했으며, 물시계이 일종인 자격루와 측우기를 발명했으며, 명실상부 조선의 최고 전성기를 누린 왕이다. 그 형이 양녕대군이다.

양녕대군은 10세 때에 세자로 책봉 받아 14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지만, 부왕 태종은 장남과 둘째인 효령을 건너뛰어 셋째 충녕에게 왕위를 계승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당시 첫째아들 양녕과 둘째아들 효령은 얼마나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을까?

그들의 아버지 이방원은 어떤 사람인가? 할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면서 개성 선죽교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손에 피를 묻힌 사람이며, 왕자의 난 때는 이복동생들을 가차 없이 죽여 버린 비정한 인물이었다. 이렇게 무서운 아버지가 동생 충녕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면 두 형제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었을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세자로 책봉되어 명목상 왕위 계승이 보장된 양녕대군이었지만 밤이면 개수구멍으로 대궐을 빠져나와 저잣거리에서 주막집 주모와 시시덕거리고, 시정잡배와 어울려 다녔다고 한다. 어쩌면 그 소식이 대궐 담장을 뛰어넘어 아버지의 귀에까지 들어가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태종 18년(1418)에 영의정 유정현 등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세자가 덕이 없으니 폐위시켜야 한다”고 건의하였고, 태종 또한 “충녕대군이 천성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아무리 춥고 더운 날에도 밤새워 글을 읽을 정도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며 사리에 통달하니 나는 충녕을 세자로 삼고 싶다”고 피력함으로 양녕대군은 세자에서 폐위되었다. 양녕대군은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왕위에 오르자, 전국을 유랑하며 풍류를 즐긴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묘역의 안쪽에 들어가면 탁 트인 정원이 있는데, 조선시대의 최고 명필로 유명한 양녕대군이 초서체로 쓴 ‘후적벽부’가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너무나 익숙한 한자인 ‘숭례문(崇禮門)’이라는 글자가 돌비에 새겨져 우뚝 서있다.

오늘 사진에서 보는 바로 이 ‘숭례문’이라는 글자가 양녕대군의 친필이다. 숭례문 현판은 2008년 화재 때 소방대원이 소실을 염려해 얼른 떼어낸 일화로도 유명하다. 현재 현판은 이 탁본을 기초로 복원된 것이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도 양녕대군의 16대 후손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명함에 ‘왕자(prince)’라고 파서 다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세상 속에 아무리 어렵더라도 성도로 살아내야 하고, 신앙 중에 어떤 시험이 있더라도 성도로 이겨내야 하기에 성도의 삶을 ‘거룩한 부담’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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