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신문

상단여백
HOME 교단 일반
슬픔을 딛고 기쁨으로 회복되는 축복을 기원합니다[제55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 폐회예배 설교] 우리안에 있는 슬픔(눅 15:2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 15:32)

우리는 지난 3일 동안 ‘주여! 부흥케 하소서’라는 주제로 부흥을 사모하며 기도했습니다. 교회와 교단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했고, 총신과 상처받은 영혼들의 회복을 위해서 부르짖었습니다. 구하면 주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응답의 기쁨을 허락하실 줄 믿습니다.

이제 제55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 폐회를 준비하면서 한 가지 더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슬픔입니다. 이 슬픔은 모양도 없고 형체도 없고 소리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슬픔은 우리 속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고통스럽게 하며, 우리의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어떤 슬픔입니까? 본문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은 세 개의 비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은전의 비유, 그리고 잃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이러한 잃은 것을 찾는 비유에서 우리가 주목해서 볼 것이 있습니다. 잃은 것을 찾음으로 인한 그 결과입니다. 잃은 것을 찾았을 때 이들은 잔치를 했습니다. 즐거워했고, 춤을 추고 기뻐했습니다.(6절, 9절, 32절)
그러나 오늘 본문을 주목해서 보면, 전체적인 흐름과 상반되는 이상한 하나의 장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아들의 반응입니다. 동생의 가출로 인해 찾아왔던 가정의 슬픔이 동생의 귀향으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집안사람들과 이웃들이 모두 즐거워하며 잔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큰아들이 그 기쁨의 판을 깨는 주역으로 등장합니다. 당연히 기뻐해야 상황을, 마땅히 즐거워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분노하며 갈등을 유발시키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이 가정의 진짜 슬픔은 무엇입니까? 재산의 탕진입니까? 아니면 아들입니까? 아들이라면 형입니까, 동생입니까? 큰아들이 슬픔의 이유라면, 혹시 그 큰아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교회에서, 교단에서 우리는 누구입니까?

교회와 예배는 기쁨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교회의 중요한 의사결정의 자리인 당회가, 교단의 미래와 희망이 되어야 할 총회가 갈등과 대립의 현장이 되어버리는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이러한 현실이 지금 우리 안에 있는 슬픔이 아닙니까?

1. 형제를 잃어버린 슬픔입니다

분노한 맏아들을 좀 더 주목해서 보십시오. 동생의 귀향으로 아버지가 잔치를 열어 기뻐하는 현장에서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30절)라고 말합니다.

이 첫째 아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첫째 아들에게는 동생이라는 형제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잔치를 하며 기뻐하는 아버지를 향해 분노하는 것입니다. 잔치의 판을 깨자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버지는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아버지는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32절)고 말합니다. 둘째 아들은 내 아들인 동시에, 너의 형제라고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를 보십시오. 가족의식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가족공동체이지, 직분공동체가 아닙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동일한 하나님이시며,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하늘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은 형제와 자매입니다. 이 이름은 권사님, 집사님이라는 직분명칭 보다 사실은 더 귀하고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교회는 이상하게도 계급공동체가 되어버렸습니다. 직분은 있는데 서로를 향한 형제의식은 망각되어 있습니다. 우리 속에 형제의식이 있습니까? 한 교회에서 함께 예배하며,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며, 한 세례를 받고, 한 교단을 함께 섬기는 우리에게 형제의식이 있습니까? 우리가 형제라면 서로 짓밟지 않습니다. 모함하지 않습니다. 목사와 장로인 우리는 어떤 관계입니까? 성도와 목회자는 어떤 사이입니까? 형제가 아닙니까? 우리 가운데 형제의식이 사라진 것은 분명 슬픔입니다.

▲ 부총회장 이승희 목사(반야월교회)

2. 자신을 잃어버린 슬픔입니다

분노한 첫째 아들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28절)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 스스로가 가족이기를 거부했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가족이 아닌 외인으로 두겠다는 의미입니다.

그 때에 아버지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31절)라고 합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너는 우리 가족이다. 너는 우리 가정에 장남이다. 그러므로 이 집에 있는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분노하는 첫째에게 장남임을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첫째는 스스로 자신을 장남의 자리에서 떠나보내고 있습니다. 자신을 잃어버린 이것이 그의 슬픔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장남이 아닙니까? 목사와 장로로 세움을 받아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자리에 서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습니까? 장남답게 교회를 기쁨의 공동체로 섬기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 스스로 갈등을 유발하여 평안을 깨뜨리며, 교회의 잔치에 판을 깨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우리 스스로 목사와 장로이기를 포기한 모습은 없습니까? 우리 자신을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3. 아버지를 잃어버린 슬픔입니다

이 슬픔이 가장 큰 비극이요 불행입니다. 첫째 아들의 항변을 다시 보면,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29절)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은 사실일지 모릅니다. 그는 집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도 없습니다. 표면적으로 굉장히 착한 아들이요, 훌륭한 가족의 구성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생이 집을 나갔을 때 아버지가 얼마나 애타게 동생을 기다렸는지 몰랐습니다. 동생이 귀향했을 때 아버지가 측은히 여기며 뛰어나가던 그 흥분된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잡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여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첫째 아들은 몰랐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죽었다가 살아온 아들”(24절)이라고 말할 만큼 아버지는 가슴 벅찼습니다. 그런데 이 첫째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첫째 아들의 마음에는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를 잃어버린 아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슬픔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목사와 장로가 된 우리가 교회와 교단을 섬기면서 무엇을 먼저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마음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이해관계입니까? 교권에 대한 욕심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목사와 장로 된 우리는 지금 형제의식을 상실하지는 않았습니까? 내 스스로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 어쩌면 잃어버려서는 안 될 하나님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지난날 순수했던 우리의 신앙이 온데간데 없어지고, 그렇게 진실하게 기도했던 기도는 사라진지 오래이며, 열심 있던 뜨거움이 내게서 사라진 지 오래되지는 않았습니까? 혹시 우리 속에 이러한 슬픔은 없는 지 다시 한 번 돌아봅시다.

제55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깊이 돌아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형제의식을, 자기 자신을,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은 슬픔을 딛고 기쁨이 새롭게 회복되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독신문  ekd@kidok.com

<저작권자 © 기독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독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