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개혁사상 부흥운동 인사이트 (insight) 왜 우리에게는 개혁사상이 필요한가 - ③개혁사상과 부흥운동

강력한 칼빈주의 전통이 자리잡았던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의 변화는 개혁사상 토대 위 일상의 개혁 중요성 알려

▲ 라영환 교수
·총신대학교 조직신학
·개혁사상부흥운동위원회 전문위원

강력한 칼빈주의 영향 아래 있었던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미술 분야가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롭다. 17세기는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기였다. 종교개혁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미술이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경제적인 요인에서 답을 찾기도 한다. 당시 네덜란드는 경제적으로 번영의 시기였다. 그리고 경제적 번영과 함께 미술시장도 함께 성장해 나갔다.

하지만 이것으로 당시 네덜란드 미술의 특징인 풍속화와 풍경화, 그리고 성경그림이 왜 그렇게 많이 제작되었는지 설명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풍경화, 풍속화, 성경그림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에게서 나타나는 독특한 장르였다. 물론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 로랭(Claude Lorrain, 1600~1682)과 같은 고전주의 화가들도 풍경화를 그리기는 하였지만,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는 이들과 구별되는 네덜란드적인 것이 있었다. 풍속화의 경우는 더더욱 동시대에 가톨릭 지역의 그림들에서 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장르였다.

스테파노 추피(Stefano Zuffi)는 17세기 네덜란드 그림들에는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로서 네덜란드인들의 문화적 자긍심이 녹아져 있다고 보았다. 그의 주장과 같이 경제적 번영이 네덜란드인들에게 자부심을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 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러한 자부심의 원인은 그들의 사상적 토대였던 ‘개혁주의 세계관’에 기인한 것임을 알게 된다.

풍속화에 나타나는 검소와 절제, 도덕성에 대한 강조는 이 시기 네덜란드인들의 종교적인 신념이었던 칼빈주의의 반영이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강력한 칼빈주의 영향 아래 있었고, 칼빈의 사상은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문화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17세기 네덜란드 프로테스탄트들은 칼빈의 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자신들의 삶속에 적용하였으며 확장시켜나갔다. 17세기 네덜란드 예술의 주요한 특징인 풍속화와 풍경화의 발전도 이러한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와 풍경화 그리고 성경그림은 종교개혁의 적용이며, 열매이자 고백이었다.

네덜란드 풍속화의 발전은 사회적이고, 신학적인 변화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종교화와 신화화 그리고 역사화를 그리는 것이 화가가 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서는 그러한 그림을 그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림 제작비용도 만만치 않았고, 또 이러한 작업을 후원할 후원자 역시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네덜란드 화가들이 발견한 것이 일상성(日常性)이다. 종교적 이미지가 사라지고 일상의 이미지가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화가들은 자신들 주위에 일어나는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화폭에 담았다. 이러한 일상성의 강조는 네덜란드 예술 작품들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주요한 특징이 되었다. 화가들은 풍경화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표현함에 있어서 과장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 화가들이 주로 묘사한 일상이 ‘일’과 관계있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들이 바라본 일상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현장이었다. 베버(Max Weber)가 지적한 바와 같이, 직업적 소명설과 세속적 금욕주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중심사상이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중세 가톨릭의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거부하고, 자신들이 하는 모든 일이 거룩하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세속적 의무이행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였다. 바벨론은 벗어나야할 곳이 아니라 파송 받은 곳이었다. 그들은 세속적 직업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증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트들의 직업에 대한 이해는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에 반영이 된다.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검소와 절제에 대한 강조다. 메인스톤(Mainstone)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시기 장르화의 중요한 주제들은 미덕과 악덕, 나태와 타락, 탐욕, 성실 같은 것들이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이러한 주제들이 자주 등장한 것은 칼빈주의의 경제윤리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프로테스탄트들은 베버가 지적한 노동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과정이고, 게으름과 태만은 죄라고 보았다. 종교적 금욕이 세속적 금욕으로 전환되었다. 검소와 절제는 당시 크리스천들의 중요한 윤리적 덕목이었다. 이 시기에 게으름과 태만 그리고 사치와 향락을 풍자하는 작품들이 많이 제작된 것은 시대적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다.

호흐(Peter de Hooch, 1629~1684)는 강력한 칼빈주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네덜란드의 일상을 화폭에 담았다. 그의 그림의 중요한 주제는 검소와 절제, 그리고 가정의 질서였다. 하비슨(Craig Harbison)은 말한다. “종교개혁은 이곳에서 진행되었다. 이는 거대한 흐름의 변화의 시기였다. 과거의 패러다임은 의문시 되었고 새로운 것들이 제안되었다.” 하비슨의 주장처럼 당시 미술가들은 종교개혁이라는 변화된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그들은 종교개혁이 던져준 과제에 대한 해답을 일상성에서 발견하였다. 일상성은 이 시기 네덜란드 풍속화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새로운 시대는 변화된 시대에 맞는 문화를 필요로 했고, 화가들은 변화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면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풍경화의 발달은 네덜란드 미술이 갖는 독특한 특징이었다. 유럽에서 풍경화가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부터였다. 그 이전까지 풍경화는 역사적 그림이나 신화와 문학적 소재의 그림들에 비해 열등하게 간주되었다. 그런데 17세기 네덜란드의 경우에는 가톨릭이 지배적이었던 지역과 달리 풍경화가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당시 제작된 그림들 가운데 대략 3분의 1이 풍경화일 정도였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은 교회 내부를 치장하기 위한 그림이나 개인의 경건성을 고양시키기 위한 그림 보다는, 이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세계관을 풍경화라는 장르를 통해서 담아냈다.

이 시기 화가들은 마치 세속적 직업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찾고자 하였던 개혁가들과 같이 세속적인 이미지를 통하여 거룩을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풍경화에 나타나는 이러한 변화는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에 대한 중세의 이원론적인 시각을 거부하고, 세상 속에 거룩을 심고자 했던 종교개혁의 정신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풍경화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발전된 독특한 화풍이었다. 당시 화가들은 이야기의 배경으로서 자연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화가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가능하면 보이는 그대로 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자연을 이상화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린 것은 중세의 미학과는 대비되는 것이었다. 이들이 바라본 자연은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 곳이었다.

강력한 칼빈주의 전통이 자리를 잡았던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예술이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흥미롭다. 변화된 시대적 상황은 화가들에게 그 시대적 상황에 맞는 소명을 발견하게 하였다. 화가들은 풍경화, 풍속화라는 장르를 통해 자신의 재능을 이어나갔고, 그 재능 속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였다. 이들에게 소명은 자신들의 재능을 통하여 성경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확실히 17세기의 네덜란드 풍경화와 풍속화 그리고 성경그림은 소재와 표현방식에 있어서 가톨릭 진영의 그림과 구별되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풍경화와 풍속화, 성경그림은 종교개혁의 열매였고 적용이었고 고백이었다.

17세기에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변화는 오늘날 개혁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려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화가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개혁사상의 토대 위에서 세우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도들은 풍속화와 풍경화에서 보는 것과 같이 삶의 체계로 구체화 되었고, 16세기에 유럽의 변방이었던 네덜란드가 반세기도 채 안 되어 유럽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로 부각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우리는 16세기 종교개혁가들과 같이, 또한 17세기 네덜란드의 프로테스탄트들과 같이 담대히 세상 속으로 들어가 개혁사상의 토대 위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건설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무너져가는 세상에 대한 대안을 성경에서 찾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 기준으로 삼고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전을 이 세상에 제시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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