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 미래다] 2018년 여름성경학교·수련회 ① 총주제 해설

 주제 :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 (마 5:13~16) 

세상이 주목하는 교회
국제투명성기구(TI)에서 조사한 2017년도 국가별 부패인식지수(CPI)에서 우리나라는 100점 만점에 54점, 180개국 중 51위였다. 이는 홍콩 13위, 일본 20위, 대만 29위보다 현저히 뒤떨어지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도는 어떨까?

지난해 총회교육진흥원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여부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 1000명 중에서 75.3%가 신뢰할 수 없다고 답했다. 산 위의 동네가 눈에 들어오듯이 세상이 교회를 주목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이쯤 되면 세상이 교회를 염려해야 할 상황이다. 이러한 때 우리는 교회를 향해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라고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것이 2018년 여름성경학교 총주제를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정한 배경이다.

가르침의 맥락에서 주제 통찰하기
‘소금과 빛’에 관한 말씀은 산상수훈 안에 포함되어 있다. 마태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마 5:2)로 시작하여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마 7:28~29)로 마무리하고 있다. 가르침으로 열고 가르침으로 닫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산상수훈 전체가 교육적 맥락임을 잘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무리에게 산상수훈을 가르치신 시점이 공생애 사역의 초기였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막 나아온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분명하게 선포하셨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가르치다’란 동사가 암시해 주는 것이 있다. 마태복음 5장 2절에 사용된 ‘가르쳐(에디다스켄)’란 동사는 미완료 시제다. 미완료 시제는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행동을 의미한다. 가르침의 내용들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역 초기부터 수준 높은 산상수훈을 교육내용으로 선포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유아들, 어린이들, 청소년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라고 가르치는 것을 주저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에서 ‘우리는’이란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는’이 아니라 ‘너희는’이었다. 이것은 소금과 빛에 관한 말씀이 개인의 영역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함으로 보여준다.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단어는 ‘세상’이다. 세상은 소금과 빛으로 부름 받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서 코메니우스(J. Comenius)는 세상을 가리켜 ‘하나님의 지혜 학교’라고 말했다. 소금과 빛의 사명은 ‘이 땅’과 ‘이 세상’ 즉 공적 영역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삼각형 구조로 본문 정리하기
본문은 이중구조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절에 따른 구조라면, 다른 하나는 의미(정체성, 사명, 목적)에 따른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절에 따른 구조는 <그림>의 좌측과 같다. 본문의 구조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면, 본문의 의도가 좀 더 명료하게 드러난다. 이는 <그림>의 우측에 제시된 ①우리의 정체성 ②우리의 사명 ③우리의 목적과 같다. 이런 각각의 내용은 금번 여름성경학교에서 다룰 각 과의 주제가 된다.

우리의 정체성: 맛을 잃지 않기(1과)
먼저 <그림>에서 ‘①우리의 정체성(A-X-A’)’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소금(A)과 빛(A’)이라는 은유의 말씀을 통해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포하신 순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세워졌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스스로 세운 것이 아니다. 팀 켈러(T. Keller)의 말과 같이 스스로 이룬 것들을 통해 증명되는 정체성은 그것들이 무너지면 함께 무너진다. 그러나 기독교 정체성은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받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정체성이다.

그렇다면 본문이 말하는 정체성에 관한 말씀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림>의 A-X-A’에서 X를 통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본문을 다룰 때, 일반적으로 소금의 의미로는 맛을 내는 특성과 변하지 않는 특성(구별됨, 순결)을 언급한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맛을 내는 것보다는 맛을 잃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구약적 배경이 담겨 있다. 구약에서 사용된 소금의 의미는 대부분 변하지 않는 특성과 관련되어 있다(레 2:13). 그래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언약적 특성을 ‘소금언약’이라고 한다(민 18:19; 대하 13:5). 하나님은 자녀와 맺은 언약을 영원히 변치 않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에게도 언약 관계에서 변치 않을 것을 요구하신다.

즉 언약에 주목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서 정체성을 지키는 길인 셈이다. 이는 곧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자녀인 우리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말한다. 관계성에 주목하는 것은 웨인 루드(W. Rood)가 말하는 기독교 교육의 본질 중 하나이다. 그래서 노만 하퍼(N. Harper)는 언약을 강조한다. 1과는 그것에 집중한다.

우리의 사명: 착한 행동으로 나가기(2과)
<그림>에서 ‘②우리의 사명’(C-X-C’)은 빛의 특성과 관련이 깊다. 즉 산위의 동네가 숨겨지지 못하는 것과 등경 위의 빛이 비치는 것은 빛의 드러나는 특성을 말한다(C). 그 특성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그 빛을 보게 된다(C’). 빛을 보게 되는 것은 빛의 특성으로 인한 결과인 셈이다. 그래서 빛의 정체성을 가진 자들의 사명은 ‘빛이 비치게 하는 것’이다(X). 그러므로 교사는 학습자로 하여금 빛의 특성을 알게 해야 하며(C), 빛이 비치게 하여 그 특성을 드러내게 해야 하고(X), 그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이 빛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C’).

그렇다면 빛이 비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먼저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란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다. 그리고 ‘너희 빛’이란 ‘너희 착한 행실’을 말한다. 그림 언어인 ‘빛’과 생활 언어인 ‘착한 행실’이 평행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비치게 하여(람파토)’란 동사이다. 이 동사의 시제는 명령법 과거 능동태이다. 드러난 순간 이미 비치고 있는 상태를 시제를 통해 보여준다. 이것은 빛의 자녀들이 행해야 할 착한 행실이 얼마나 즉각적으로 시행되어야 하는지를 강조한다.

또한 ‘비치게 하여’란 동사는 본문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명령법 동사이다. 헤그너(D. Hagner)에 따르면, ‘비추다(람페인)’란 동사는 구약이나 랍비 문헌에서 명령법으로 사용된 예가 없으며, 특히 신약의 윤리적 가르침에서 사용된 적이 없다. 이는 착한 행실을 실천할 것을 강하게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2과는 착한 행실의 실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의 목적: 하나님의 영광 나타내기(3과)
비록 ‘②우리의 사명’(C-X-C’)과 ‘③우리의 목적’(D-X-D’)은 구조 상 중첩되고 있지만, 3과의 초점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D’)에 맞추어져 있다. 즉 3과는 착한 행실의 궁극적인 목적을 다룬다. 우리가 빛의 자녀로서 행하는 즉각적인 선행은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소금과 빛 본문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최상의 목적인 것이다.

칼빈은 제네바 교회 교리문답에서 하나님에 대한 참되고 올바른 앎이란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한다. 본문은 그 앎이 착한 행실로 나아가도록 촉구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착한 행실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것도 빛과 같이 즉각적으로 실행되는 착한 행실을 통해서 말이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배운 내용이 진리임을 믿게 되어도 무익하며, 가르치는 방식이 아무리 재미있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3과는 실천 적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희망을 품고 도전하자
“가르친다는 것은 함께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란 말이 있다. 2018년 여름성경학교를 위한 우리의 모든 수고는 ‘이미’의 지금과 ‘아직’의 장차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작은 몸짓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삶의 현장에서의 작은 순종이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예수님의 신비롭고 고귀한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정체성과 관련된 진심어린 고백만으로도 영광 받으시는 분이시다. 하물며 서툴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착한 행실을 실천하는 우리 아이들로 인해 기뻐하지 않으시겠는가? 또한 그 곁에서 소금처럼 녹아지며, 양초처럼 빛을 내는 교사들로 인해 큰 영광 받으실 줄 믿는다. 올 여름 소금의 정체성으로 빛의 행실을 실천할 수많은 빛의 자녀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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