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개혁사상 부흥운동 인사이트 (insight) 설교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강단의 위기 극복할 때 한국교회 회복 … ‘거룩한 부담’ 잊지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연구와 노력해야

지난 글에서는 한국교회가 회복되기 위해 개혁과 부흥이 수레의 양 바퀴와 같이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본고에서는 설교와 설교자의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교회의 위기를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겠지만, 강단에서 바르지 못한 말씀 선포가 위기의 대표적이고 근본 원인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왜곡된 말씀의 선포가 교회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지 기독교 역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 김창훈 교수
·총신대신대원 설교학
·개혁사상부흥운동위 전문위원

물론 강단의 위기는 설교자와 성도들이 함께 책임져야할 문제이다. 먼저 성도들이 설교를 들어도 허전함을 느끼고, 영적인 배부름을 경험하지 못하며, 삶이 변화되지 않는 것은 설교자들이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강단이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것이 전적으로 설교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씨 뿌리는 비유’가 있다. 주님께서는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씨를 뿌리지만 밭의 종류에 따라 결과가 다르다고 말씀하셨다. 강단에서 같은 말씀이 선포되어도 듣는 사람의 심령의 밭(영적인 자세)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오늘날 설교의 위기는 설교자와 청중의 문제가 겹친다. 그러나 필자는 궁극적으로 설교의 위기에 대한 책임은 설교자(목회자)가 져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묵은 땅을 경작해서 옥토로 만들어야 할 책임까지도 설교자가 감당해야 할 의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교자의 관점에서 강단 위기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강단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설교자의 자세가 무엇인지 논하고자 한다.

1. 강단 위기의 원인
먼저, 건전하지 못한 설교관이 문제다.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한국교회 많은 목회자들에게 최고의 관심은 ‘교인 수(數)’다. 그러한 목회의 관심과 방향은 설교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교인 수가 최고의 목표인 설교자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설교가 무엇인가?’ 또는 ‘어떻게 성경적이고 바른 설교를 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보다도 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설교에 더욱 큰 관심이 있다.

실제로 많은 설교자들이 그저 ‘꿩 잡는 것이 매’라는 식의 설교를 한다. 그들 가운데는 청중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 설교자들의 설교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모방하는 분들도 있다. 한국교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설교자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르고 건전한 설교관이다. 다시 말해 설교자의 최우선적 관심은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하시는 설교여야 한다.

다음으로, 너무 많은 설교와 사역으로 인한 설교 준비의 부족이 문제다. 보통 한국교회의 설교자가 감당해야 하는 설교의 횟수와 양은 너무 많다. 특히 소형교회에서 혼자 설교 사역을 하는 경우에는 일주일에 10번 이상, 일 년이면 500번 이상 설교해야 한다. 또한 규모가 작은 교회는 설교 외에도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다. 사람의 지식과 역량이 한계가 있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 신선하고 영양가가 있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엄마가 영양가 있는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면서 아이에게 젖을 주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설교학자들은 대개 1분 설교하는데 한 시간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한다. 많이 양보하더라도 1분 설교하는데 30분은 준비해야 한다. 그러니까 30분 설교를 위해서 기본적으로 15시간은 준비해야 한다. 이 기준을 따른다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의 설교를 할 수 없다.

세 번째로, 한 편의 설교를 위한 해산의 수고가 부족함이 문제다. 주변의 설교자들 가운데 묵상 없이 너무 쉽게 설교하는 것을 자주 본다. 물론 많이 수고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반드시 양질의 설교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묵상하고 고민하면서 최선을 다할 때 좀 더 은혜로운 말씀을 전하는 것은 창조질서이다. 쉽고 편하게 설교하는 것과 관련하여 가장 심각한 문제는 남의 설교를 도용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설교를 참고할 수 있지만, 그대로 들고 나가는 것은 일종의 ‘죄’다. 크리소스톰은 다른 사람의 설교를 도용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것보다 더욱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깊은 묵상과 많은 노력을 통한 해산의 수고가 있을 때 강단이 살아날 수 있다.

2. 설교자의 자세

그러면 강단의 회복을 위해 설교자가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설교는 목회자에게 가장 중요한 사역임을 명심해야 한다. 설교가 목회의 전부는 아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는 심방, 상담, 행정, 그리고 외부 활동(노회나 총회 또는 동료들과의 모임)도 해야 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목회의 최우선 순위에는 설교 사역이 있어야 한다.

사도행전 6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그들이 감당해야 할 최우선의 사역이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임을 확신하였기에, 사역의 다른 부분들을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과감하게 위임하였다. 오늘날 설교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목회자가 설교 사역의 우선순위를 인정한다면 그것은 목회의 방향과 사역에서도 드러나야 한다. 다시 말해, 교회적으로는 평신도 지도자들을 훈련시켜 목회자 사역의 상당한 책임을 위임해야 하고, 개인적으로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설교 준비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그때 설교를 위해 충분한 시간 투자를 할 수 있고, 이는 궁극적으로 교회와 성도를 살리는 최선의 선택이 된다.

다음으로 설교는 가장 부담스러운 일임을 명심해야 한다. 야고보 사도는 말씀의 선생들에게는 더 큰 심판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많이 선생 되지 말라고 하였다(약 3:1).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에게는 막중한 책임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또는 처음 신앙을 가졌을 때 들었던 설교가 평생 그 사람의 신앙과 삶에 긍·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침을 우리는 자주 경험한다. 뿐만 아니라 설교가 성도들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시점-성공과 실패 또는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에 있을 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경우도 다반사다.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가 성도들에게 미칠 여러 가지 영향력에 대한 부담을 가져야 한다. 그럴 때 아무렇게나 또는 손쉽게 설교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준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능력 있는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 설교는 즐거운 일이 되어야 한다. 설교는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설교가 힘들고 어렵기만 하다면 어떻게 평생 설교자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어느 목사가 “설교는 어려워도 설교 준비는 즐겁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았다. 필자는 그 고백이 모든 설교자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교 준비를 하면서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놀랍고 오묘한 진리를 깨달았을 때의 기쁨을 경험해 보았는가? 또한 깨달은 진리를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고 그것을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나누면서 신앙과 삶이 변화되는 기쁨과 감격을 경험해 보았는가? 그것은 너무 신나고 행복한 일이 아닌가! 설교가 힘들고 부담스러운 일임에 틀림없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가장 즐겁고 기쁜 일이 될 때 설교 사역을 더욱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로, 자기 발전을 위해 계속적인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흔히 신학교 3년 동안 배웠던 지식은 실제 목회에서 3개월이면 바닥난다고 한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신학교에서 배운 것은 본격적인 사역과 연구를 위한 기초 작업이기 때문이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공부와 연구는 평생 과업이며, 특히 자신의 설교 사역에 있어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계속 수고하고 노력해야 한다. 사회에서도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데 설교자가 연구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것은 일종의 직무유기다. 강단의 회복을 위해 설교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발전을 위한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는 말씀의 능력을 믿고 설교해야 한다. 성경은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할 수 있다(히 4:12). 실제로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얼마나 큰 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대마다 다양한 설교자들을 세우셨고, 그들을 통해 놀라운 일들을 이루셨다. 설교의 은사와 능력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설교자는 베드로, 바울, 루터, 칼빈,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드, 무디, 빌리 그레이엄처럼 쓰임 받을 수 있다. 자신의 능력만을 생각하면서 설교 사역의 결과에 스스로 포기하거나 한계를 정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설교자는 그저 목회자니까, 또는 설교의 순서를 맡은 사람이니까 설교해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인간적으로 아무리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일지라도 말씀을 제대로 전하기만 하면 그 말씀이 놀라운 능력으로 역사할 것으로 믿고 설교해야 한다.

이 땅의 모든 설교자들이 말씀의 능력을 확신하며 성령의 역사하심을 사모하며 최선의 노력을 다함으로 설교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기를 바란다. 그로 말미암아 한국교회가 제2의 전성기를 경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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