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왕 목사의 아름다운 자연사진 이야기] (17)맹수와 영양이 공생하는 사파리-탄자니아 세렝게티 국립공원

아프리카 각지에 산재하는 동물보호 국립공원(Safari)안에서는 동물원 같은 데서 흔히 보는 철망 울타리는 찾아볼 수 없고, 드넓은 평원과 강과 호수와 산기슭에 갖가지 동물들이 무리를 지어 공생 공존하는 평화스러운 장면이 펼쳐진다.

세계 각처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적잖은 시간과 돈을 들여 사파리를 찾는 이유 중 하나는 수많은 동물들 중에서도 ‘빅 파이브’라고 일컫는 ‘사자, 표범, 코끼리, 코뿔소, 물소(buffalo)’ 등과,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떼를 지어 이동하는 동물들의 장관을 보기 위해서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사륜 지프차에 올랐다. 전문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사파리 곳곳을 뒤지다보면, 어쩌다 상위포식자인 사자나 표범 같은 맹수들이 가젤(gazelle)이나 누(wildbeest), 물소 등을 사냥하는 장면을 포착할 때가 있다. 이 광경을 제일 먼저 발견하는 안내자의 무전 소리가 들리면 사방에서 지프차들이 모여든다. 이윽고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사진에 담으며 스릴 만점의 순간을 경험한다.

사자는 사람과 달리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과 순간적으로 엄청난 속도로 내달을 수 있는 튼튼한 네 다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이용하여 약한 짐승을 사냥한다. 그런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사자를 매우 포악한 맹수라고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이 난폭한 사자를 잡아 약재로 쓰려는 밀렵행위가 아프리카에서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AFP통신은 지난해 “림포포 지역의 한 농장에서 여러 마리의 사자가 머리와 발목이 잘린 채 발견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반대로 지난달 AFP통신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한 사파리에서 사자의 공격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밀렵꾼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뉴스를 내보낸 적도 있다. 경찰은 시신 곁에 놓여있던 사냥용 소총을 토대로 피해자의 신원 파악에 나섰다.

그렇다면 밀렵꾼에 희생된 사자가 많을까, 아니면 사자에게 희생된 밀렵꾼이 많을까라고 묻고 싶다. 해마다 밀렵꾼에 의해 맹수의 개체수가 점점 줄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말 포악한 것은 사자가 아니라 사자를 사냥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게 더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지난 해 여름 단기선교 팀과 더불어 선교지 케냐와 탄자니아를 방문하여 미리 계획한 공적 사역을 마친 후, 사파리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아프리카에는 유명한 사파리들이 여럿 있지만 필자가 처음 방문한 곳은 탄자니아에 있는 세렝게티 국립공원(Serengeti National Park)이었다. 이곳에서 2박 3일 일정으로 사파리 체험을 한 적이 있다. 세렝게티 국립공원은 그 면적이 1만 4760㎢로 경기도의 14배나 되는 광활한 초원지대이다. 마사이족의 언어로 ‘끝없는 초원’이라는 뜻을 가졌다.

오늘의 사진은 세렝게티 사파리에서 담은 장면으로 멀리 왼편에는 가젤과 같은 영양들이 사주경계(四周警戒)를 하면서 풀을 뜯고 있었고, 오른편에는 한 걸음이면 이를 수 있는 근거리에 사자 가족이 배가 부른지 편안히 누워서 낮잠을 즐기는 중이었다. 사자 한 마리만 깨어서 유심히 가젤들이 있는 편을 주목하고 있었다.

필자도 몹시 긴장하여 가슴이 두근거리는 채로, 혹시나 사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냥할지도 모를 순간을 대비하며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카메라의 망원렌즈를 고정시켰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사자가 꼼짝 하지 않기에 결국 포기하고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사나운 맹수인 사자이지만 배가 고프지 않으면 사냥을 하지 않는다. 또한 사냥을 좀 더 잘하기 위해서 체력단련을 하거나 사냥하는 법을 연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어미에게서 배운 대로만 할 뿐이다. 배가 고파 사냥을 할 때면 무리들 가운데 제일 약해 보이는 한 마리만을 집중으로 공략한다. 사냥감이 크든지 작든지 가리지 않고 일단 포획했으면 그것만 물고 풀숲에 들어가서 무리와 함께 맛있게 나누어 먹는다.

맹수는 먹고 남는 것은 냉장고에 보관하는 일이 없다. 배부르면 아무 미련 없이 남은 것을 버려두고 유유히 자리를 떠나거나, 모두 나무 그늘에 널브러져서 잠을 잔다. 맹수가 남기고 떠난 먹이는 하이에나나 독수리 같은 짐승들이 깨끗이 먹어치운다. 이처럼 표범이나 치타와 같은 맹수들은 늘 신선한 먹이를 먹을 뿐 아니라, 사냥감 하나로 만족하고 더 욕심을 부리지 않기 때문에 약한 짐승들이 여유롭게 초원에서 풀을 뜯을 수 있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은 당장 먹을 것과 먹고 남을 것만이 아니라, 먹지 않을 것까지 갖기 위해 냉장고와 냉동창고와 산이라도 들어갈 정도의 거대한 창고를 짓고 그 안에 쌓아두기에 정신이 없다. 물론 인간이나 맹수나 식욕은 동일하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사냥하는 것은 같지만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맹수는 필요 이상을 탐하지 않으나, 인간은 필요 이상으로 독점하려고 하는 탐욕스런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단어인 ‘생존경쟁’이란 사실 ‘탐욕의 경쟁’인 것이다. 바로 이 탐욕이 오늘의 가정과 사회는 물론 교회까지 무너뜨리고 있다. 유아독존(唯我獨尊)적인 탐욕은 공생과 공존을 위협함은 물론, 자연 질서와 영적 질서까지 파괴하는 악의 본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조차 이에 대해 자유롭지 못한 것이 늘 죄스러울 뿐이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렘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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