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청교도들이 성공회의 핍박을 피해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왔다. 그들은 <주홍글씨>라는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청교도적인 순결, 정결, 엄격한 규율을 목숨처럼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엄격한 규율을 생명처럼 지키며 살아도 심령이 점점 황폐해지면서 껍데기만 남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 부흥의 절실함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겉으로는 청교도의 규율을 지킨다고 하면서 심령은 얼마나 메말라 가고 있는가. 먼저 우리가 각성하고 부흥을 갈망해야 한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와 조지 휫필드가 영적 각성과 부흥운동의 횃불을 들고 1차 대각성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아무리 계율을 지키고 청결하게 살아도 심령이 고갈되면 안 된다. 그 속에는 부흥의 능력이 없다. 부흥은 각성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왜냐면 아무리 경건의 모양이 있더라도 자칫하면 외식할 수 있고 냉소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대도 각성운동이 먼저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부흥을 갈망할 수 있다. 그대는 어떤 사람인가. 경건의 모양만 간직한 채 부흥에 대한 갈망이 없는 냉소적인 사람인가, 영적 각성과 부흥을 향한 갈망으로 뜨겁게 타오르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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