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개혁사상 부흥운동 인사이트 (insight) - 개혁주의 신약신학 ③ 공동체 의식 개혁

독선처럼 보이는 구원관의 ‘절대성’ 때문에 누구라도 공동체 일원이 되는 ‘기독교의 포용성’ 가능

‘개인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개인주의의 장점과 ‘인간의 존엄성을 재고한다’는 인본주의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두 사상의 팽배는 상대적으로 공동체 의식과 신본주의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성경에는 인간 개개인뿐 아니라 약자와 소외계층의 가치와 존엄성을 중시하는 사상이 담겨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는(신 10:18) 하나님의 율법에는 고아와 과부를 위한 특별법으로 가득하다(신 14:29; 16:11, 14; 24:19~21; 26:12~13). 하여 야고보서에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을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과 연결 짓는다(1:27).

▲ 박형대 교수 ·총신대학교 신약신학 ·개혁사상부흥특별위 전문위원

누가복음에는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선하고 의로운 과부들에 대한 소개가 두드러진다.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2:36), 선지자 엘리야가 보냄 받았던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4:26),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헌금한 어떤 가난한 과부(21:2)가 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를 통해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18:7)의 예(例)로 어떤 도시에 사는 한 과부를 언급하셨다(18:3). 또한 나인 성 과부를 불쌍히 여기셔서 죽은 아들을 살려주셨다(7:11~15). 이는 당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과 대조되는 모습이다(20:47).

그러하니 ‘성경에 기초한 신본주의’는 인간 존엄과 가치를 중시하는 사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중심의 교회론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약 2:3) 하는 행태를 죄를 짓는 것으로 규정한다(2:9). 그런데 교회가 ‘이기심(利己心)과 독선(獨善)’을 가졌다는 지적을 받는다면 개혁이 필요할 것이다.

세상은 교회가 제시하는 ‘구원의 길’을 ‘독선’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 외에 다른 구원자가 없다’고 담대하게 선포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1~12). 구원을 위한 절대적인 이름이 있다. 바로 ‘예수’이다. 이름이 예수라고 다 구원자가 아니다. (언제) 유월절에, (어디서)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무엇을) 대표적 대속을, (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어떻게) 완전히 이루신, (누가) 오직 그 예수께서 유일무이한 구원자이시다.

사람들이 독선처럼 여기기도 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구원은 없다”는 것은 사실 기독교의 ‘무조건적 포용성’의 기초가 한다. 독선처럼 보이는 구원관의 절대성 때문에 누구라도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기독교의 포용성’이 가능한 것이다. 절대적인 구원 기준이신 예수님께서 특별하시기 때문이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요 1:3). 어떤 피조물도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포용성을 가질 만큼 포괄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선재하신 예수 그리스도,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1:18)이시기에 누구라도 품을 수 있으신 것이다. 누구라도 한 가족이 되게 하신다. 절대적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라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 한 가족이 될 수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예수)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1:12).

이처럼 기독교의 포용성과 절대성 사이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가 있다. 신자들은 기독교의 절대적 표준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누구라도 믿기만 하면 형제(형, 아우), 자매(언니, 동생)이라 부를 수 있는 포용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혈육지친이라 하더라도 예수께서 주와 그리스도 되심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가족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때로 기독인들은 한없이 따뜻해보이다가도 차갑게 돌아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 자신의 의지로 그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대적 표준에 기초하여 하나님에 의해 주관되기 때문에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이 그리하는 것이다.
그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기초하여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하는 신본주의적 공동체 의식’을 살펴보자. 우선 예수님은 사도 열둘을 구별하여(눅 9:1~6), 칠십 인을 둘씩 짝 지워(10:1~20) 일을 맡기셨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열하나’ 혹은 ‘열둘’이라는 숫자로(1:26; 2:14; 6:2; 비교. 1:13~16), 집사들은 ‘일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21:8; 비교. 6:5). 또한 제자들의 이름이 둘씩 나오는 경우가 많다. 베드로와 요한(3:1, 3, 4, 11; 4:13, 19; 8:14), 바나바와 사울(11:30; 12:25; 13:2, 7), 바울과 실라(15:40; 16:19, 25, 29; 17:4, 10), 실라와 디모데(17:14, 15; 18:5)이다.

이러한 ‘공동체 의식’(the sense of community) 혹은 ‘함께 하는 즐거움’(togetherness)은 1인칭 복수가 쓰인 ‘우리 본문’(the we-passages)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 본문’은 드로아에서 빌립보까지의 여정(16:10~17), 빌립보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20:5~21:18), 가이사랴에서 로마까지의 여정(27:1~28:16)을 지칭한다.

우선 드로아에서 빌립보까지의 여정은 2차 전도여행의 일부이다. 이때 바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 안디옥을 출발했다(15:40). 그리고 1차 전도여행지였던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데려간다(16:3). 이어 긴 방황이 시작된다. 이 기간 동안 복음 전도 열매에 대한 소개가 없다(16:6~9). 그런데 바울의 드로아 환상 소개 뒤에 나오는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라는 표현에서, 사도행전 기자인 누가가 합류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6절에서 8절 사이에 만났다. 여러 지명이 나온다. 브루기아, 갈라디아, 무시아, 비두니아, 무시아, 드로아라는 지명을 통해 바울 일행이 서쪽, 북쪽, 서쪽, 동쪽, 서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을 알 수 있다. 이고니온에서 드로아까지 직선거리만 약 580킬로미터인 것을 생각하면 1500킬로미터 정도를 석 달간 방황한 듯하다. 이 정도 되면 디모데가 집에 가겠다고 말할 만도 한데, 디모데는 마가와 달리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전도여행을 처음 따라온 실라도 달리 불평이 없다. 석 달 정도 방황할 때 누가가 일행이 되었다. 목적도 없는 듯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바울 일행에 누가가 합류한 것이다. 바울이 방황할 때, 성령께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막으실 때, 예수님께서 약속하셔서 임하게 된 ‘예수의 영’이 원하는 바를 허락하지 않으실 때, 더 이상 갈 곳 없는 드로아까지 밀려갈 때, 바울은 그의 평생 동역자 누가를 만났다. 이렇게 구성된 네 명의 전도대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로 이어지는 전도지역을 효과적으로 전도하였다. 그들은 ‘우리’라고 불릴 만한 전도대였다.

두 번째 ‘우리 본문’인 빌립보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의 첫 부분(20:5~6)에 나오는 ‘우리’는 바울과 누가를 가리킨다. 아홉 명 가운데 일곱 명은 드로아로 바로 출발했고, 두 명은 빌립보를 거쳐 드로아로 향했다. 이어지는 드로아 부분(20:7~8)에서 ‘우리’는 밤새 집회했던 성도들 전체를 가리킨다. 다음 출항 부분의 ‘우리’(20:13~14)는 바울을 뺀 나머지 여덟 명을 의미한다. 밀레도 출항에서 아가보 예언 부분의 ‘우리’(21:1~11)는 아홉 명 모두를, 예언에 대한 반응 부분의 ‘우리’(21:12, 14)는 바울을 뺀 여덟 명을 뜻한다.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는 부분의 ‘우리’(21:15~17)는 아홉 명 전체를 뜻하고, 마지막 절(21:18)에서 ‘우리’는 바울을 뺀 나머지 여덟 명을 의미한다. 누가 입장으로 보면, 처음에는 바울과 단 둘이 ‘우리’가 되었다가, 다음에는 드로아의 성도들을 포함한 모두와, 그 다음에는 바울을 뺀 일행 여덟과, 그 다음에는 일행 모두와 ‘우리’가 된다. 밀레도에서 가이사랴 갈 때도 아홉 명이 ‘우리’가 되었다가 바울 뺀 여덟 명이 ‘우리’가 되고,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에 갈 때도 아홉 명 모두가 ‘우리’였다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는 바울을 제외한 여덟과 ‘우리’가 된다. 바울은 나머지 여덟과 ‘우리’가 되었다가 안 되었다가 한다. 예루살렘 도착한 다음 날부터 바울 홀로 구별된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범위가 중요해 보인다.

마지막 세 번째 ‘우리 본문’인 가이사랴에서 로마까지의 여정을 보면, ‘우리’는 더욱 포괄적으로 사용된다. 가이사랴 출항 부분(27:1~2)의 ‘우리’는 바울과 누가를 가리키는 듯하다. 바울은 피고로 항해한다. 누가는 아마도 바울 개인 의사나 백부장이 거느린 그룹의 수행 의사 정도의 자격으로 함께 했을 것 같다. 이어지는 부분의 ‘우리’(28:3~8)는 최소한 ‘아리스다고’를 포함한다. 어려움이 구체화되기 시작하는 부분부터 ‘우리’는 ‘배에 탄 모든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다(28:4~8). 그런데 미항에서 바울이 말한 부분부터 ‘우리’는 바울 일행만을 가리키지 않고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을 확실하게 의미하기 시작한다(27:10). 27장 16절의 주어도 1인칭 복수이다. 폭풍에 고생하는 ‘우리’(27:18)도, 풍랑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 필요한 ‘우리’(27:20)도 탑승객 전체이다. 마침내 풍랑에서 구원받기 전날, ‘우리’의 숫자가 알려진다. “한데 배 안에 있는 우리 모두의 수는 276이었습니다”(27:37). 멜리데 섬에 도착한 뒤에도 ‘우리’가 가리키는 바는 바뀌지 않는다. 바울 일행은 구조된 다른 승객들과 계속해서 ‘우리’이다(28:1, 2, 7, 10). 그러다가 헤어지는 시점에 와서야 바울 일행은 다른 이들과 분리된다(28:11~16). ‘우리’는 다시 바울 일행을 지칭한다.

‘우리’라는 용어를 많이 썼던 우리 민족의 언어생활이 영어의 영향, IMF 이후 직장 생활의 변화 등으로 바뀌고 있다. 용어뿐 아니라 공동체 의식 자체도 바뀌는 듯하다. 이런 시기에 교회가 성경적인 공동체 의식 확립에 노력한다면 국가적으로도, 복음 전도 면에서도 중요한 기여를 하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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