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교회의 위기는 목회자의 위기이고 목회자의 위기는 신학 교육의 위기에 있었다. 일찍이 1938년 9월 10일 제27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되었고 신사참배 가결이라는 오욕의 자취를 남겼다. 이후 장로교 선교부도 평양신학교를 폐교했다. 1939년 3월 3일 총회는 신학 교육부 모임을 갖고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총회에서 직영하기로 결의했다. 당시 4개 선교부와의 협의를 거쳐 기존 평양장로회 신학교 교사와 기숙사를 인계 받으려 했으나 무산되었고 진통 끝에 1940년 2월 9일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4월 11일에 개교하였다.

당시 교장 채필근 목사는 “기독교 일본화 운동의 제일선에 서서 미영 의존주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순 일본정신에 의해서 갱생하기를 스스로 맹세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렇게 기독교 일본화 운동에 앞장섰던 어용 총회는 1942년 31회 총회를 마지막으로 해체되었다. 당시 신사참배를 피해서 만주로 간 총회 인사들은 만주봉천 신학교를 세웠고 해방 이후 북한 5도 연합노회는 교회재건을 위한 노력 끝에 어용신학교로 전락했던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다시 복구하였다.

그러나 북한정권은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감리교회의 요한 신학교와 병합 “기독 신학교”라는 공산당을 위한 어용 신학교로 만들어버린다. 1946년 6월 남부총회는 일제 치하 서울에서 개교하였던 조선 신학교를 남부 총회 직영신학교로 한다고 결의했지만 이러한 결의는 한국장로교단에서 교권을 장악하고 있던 자유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인사들의 주동으로 된 결의였기에 결국 김재준의 신학 사상이 문제되어 총회가 분열하는 아픔을 겪는다.

역사의 파란을 따라 1949년 제 35회 총회는 장로회 신학교를 총회신학교로 인준 조선 신학교와 합치도록 결의했지만 1951년 5월 25일 동란 중 모인 제 36회 부산중앙교회 총회는 총회 신학교를 설립키로 가결 장로회 신학교는 개교 4년 만에 졸업생을 배출 폐교되고 총회 신학교가 설립된 것이었다.

문제는 신사참배 후 세워진 평양신학교 조선신학교 봉천신학교 출신들 중 다수가 한국 장로교회를 4분5열 시키는 주역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신학교육은 교단의 미래를 향도하는 방향타인데 지금 우리들의 모교 총신이 난파선의 모습으로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욕심을 내려놓자 그리고 교단의 미래를 책임질 목회자 후보생들이 더 이상 망가지지 않게 하자 총신이 은혜와 진리의 전당이 되어 명실공히 개혁주의의 요람이 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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